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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Mar 15. 2020

지금의 몸을 긍정한다는 것은.

아직 읽지 않았다면:  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처음에는 K의 추천으로 읽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가면서도 사적인 영역에 갇혀 있지 않은 책이라고 했다. 1년 전, 『아픈 몸을 살다』를 읽었을 때 백인 지식층 남성이 어떻게 자신의 질병을 경험했고, 개인의 질병과 돌봄이 어떻게 사회에서 인식되는지 들여다본 책 정도라고 생각했다. 질병도 돌봄도 낯설었을 때의 이야기다.      


두 달 전, 무심코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픈 몸을, 어떻게 이 사람은 살아 냈을까. 두 번째로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이 사람의 글이 꽤 깊이 나를 끌어당겼다. 읽는 동안 때로는 공감하고 감탄하며, 동의하고, 긍정했다. 그리고 때로는 초월한 듯한 태도에 의구심을 가지며 고개를 저어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자의 경험은 새로운 것을 계속 말하고 있어서 놓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친구가 자신의 책을 보내주면서 이 책을 함께 선물했다. 『아픈 몸을 살다』와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아서, 웃었다. 그리고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겠지만, 동의한다고 나도 그렇다고 표시해 둔 부분이 너무 많기도 해서 난감하기도 하지만. 질병이나 돌봄을 자신의 삶과 밀착해서 경험한 사람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그의 삶 어디쯤에서 이 책을 펼쳤을 때 마음을 유난히 잡는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좋은 책은 활자는 변하지 않았지만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를 찾게 하는 묘한 기운이 있으므로. 이 글을 읽고 누군가가 언젠가 이 책을 떠올리며 책을 펴는 그 순간을 기다려 보기로 하겠다.    

  

『아픈 몸을 살다』는 저자 아서 프랭크가 경험한 질환, 파트너 캐시를 통해 발견한 돌봄에 대한 성찰, 그리고 아픔을 대하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른아홉에 찾아온 심장마비와 마흔에 발견한 암에 대한 경험을 차근차근 얘기하는데, 저자의 표현처럼 ‘질병을 적극적으로 살아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또한 아픔을 얘기하면서 질병을 살아가는 주체가 자신뿐만이 아니라 파트너와 주변 사람임을 잊지 않으며 “모든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것’과 ‘내가 남들을 통해 살아낸 것’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은 없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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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희미한 확신이 들 무렵 X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아토피 피부염을 예로 들면서, 질병은 어쩌면 함께 살아가는 거라고 말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X의 애정 어린 조언을 듣자마자 마음에서 튕겨냈다. 난, 질병과 함께 살고 싶지 않았다. 함께 삽시다, 하고 초대한 적도 없는데 왜 같이 살아가야 해. 할 수만 있다면 허락도 없이 들어온 이 불청객을 쫓아내고 싶었고 이겨내고 싶었다. 한 동안 병원에서 검사를 받을 때도, 지인들에게 증상을 설명할 때도 난 염증을 다른 존재로 치부해 얘기했다.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한다나 봐.  

폐와 겨드랑이의 임파선을 타고 염증이 커졌대요. 

유육종증이 뭐냐면 말이지...      


질병은 내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의식은 내 폐만 따로 떼어내 다른 존재로 인식하는 듯했다. 나의 정신은 내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몸을 대했다. 그게 더 맞는 말이겠다. 특히 엑스레이나 CT 촬영 결과지를 볼 때면 흑과 백 모니터를 가득 채운 자잘한 점들과 커다란 구멍들은 내 몸이면서 아니었다. 저자가 경험한 질환은 환자의 대부분이 백인이며 중간·중상 계층의 직업에 주로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고환암이었다. 사회적으로도 이미 어느 정도 인정받고, 파트너도 있으며, 심장마비를 겨우 넘겨낸 저자에게 암의 발견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경험이지 않았을까.      


암은 단지 신체 과정의 일부로, 그냥 생겼다.      


그런 저자가 암은 그냥 생긴 것이라고 했다. 암의 경험을 덤덤하게 글로 적어내기까지 이 사람이 겪었을 시간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싶지만, 이 말은 가장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위로가 되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처럼 질환을 생각하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수없이 물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원인이 불명확하다고 했고 염증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저자는 ‘그냥 생겼다’고 얘기해주었다. 불명확한 답은 불안했고, 묵묵부답에는 답답했으며 그냥 생겼다는 말은 어처구니없기도 했지만 죄책감을 덜어 주기도 했다. 그냥 생긴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질환을 내 몸 밖 무엇이 아닌 신체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의 경우 이 염증들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내 몸속에 있으므로 사르코이드는 내가 싸우거나 이겨야 하는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이 마음만 먹으면 어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필요한 태도였다. 아서 프랭크는 자신이 걸린 암을 의인화해서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 보며 통제할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질병이 어떻게 내 정신과 상호작용하는지 살피며 몸이 이끄는 대로 맡겨야 하는 것임을 당부한다.       


절반 정도 수긍한 것 같다. 이해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매일 먹는 스테로이드들이 염증을 줄이는데 큰 효과를 보였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은 결과를 볼 때마다 속상하다. 술까지 끊었는데, 왜 줄어들지 않는 건지. 그동안 내 의식과 상관없이 잘 버텨온 몸의 경이로움은 잊어버리고 약의 효능과 나의 노력에 대한 보답을 기대한다. 몸은 의사의 치료나 환자의 의지로 통제하는 영토가 아니며, 낫게 한다는 목표로만 몸을 바라본다면 성공과 실패만 있을 것이라고 아서 프랭크는 얘기한다. 몸이 어떤 상황인지 감지하고, 여전히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긍정하고, 그럴 수 있도록 챙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이후의 것은 몸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래야 사실 마음도 편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꽤 많은 부분에 공감을 했는데 이 책을 누군가에게 소개하고자 글을 쓰려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달성할 수 없는 목표, 즉 내가 느낀 것을 그대로 전달하고픈 마음이 앞서다 보니 글이 나아가질 않았다. 몸이 의학의 식민지가 아니라는, 몸은 의식이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역사이며 어떨 때는 몸이 하는 대로 두어야 한다는 메시지 말고도, 나의 경험을 빗대어 소개하고픈 지점이 많았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 반대로 나는 몸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고, 왜 그럴까 하는 물음이 글을 쓰는 내내 따라다녔다.    

  

몸을 잘 다룰 줄 안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질병은 하나의 과오처럼 느껴졌고, 그러므로 찾아오는 쉼은 사회적으로 생산적이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건강한 몸, 다시 말해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는 몸이 인정받는 사회에서 아픈 몸은 환영받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이 인식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었다는, 저 밑에 숨어있던 생각들이 나에게 찾아온 질병을 통해 드러났다. 쉼이 익숙한 사람도 아니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라, 갑작스러운 변화는 혼란과 더불어 무기력함을 가져왔다. 질병이 내 정체성을 모두 대표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하고 사고한 적도 있었다. 또,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활동가가 직업인지라 다들 바쁘게 활동하는데 나 혼자 몸을 돌보겠다고 있는 것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몸의 해방은 의식과 정신의 해방과 연결된 것이라며 그렇게 몸을 움직여왔는데, 몸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말해왔는데, 사실은 내가 얼마나 내 몸을 긍정하며 살아왔던가 하는 질문이 나를 맴돌았다.      


몸을 긍정하고 몸이 경이로움을 표할 수 있도록 두는 것은, 몸이 나와 사회가 인식하는 것처럼 ‘건강한 몸’의 기준에 미쳐야 한다는 것이 아님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질병과 함께 살아가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 몸을 어떻게 인식하고 의식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태도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더 존중받기 위해서는 사회가 몸을 바라보는 인식도 동시에 변화해야 한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아픈 뒤로 예전 같았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던 운동을 하고 있다. 다니던 운동센터 ‘다짐’이 코로나 19로 인해 휴관 중이라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으로 운동을 조금씩 찾아서 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휴직을 끝내고 복직했을 때 건강한 몸이 되어 있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다. 그래야 다시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또 아프기 싫으니까.      


글을 마무리하면서, 내 몸을 긍정하는 태도는 무얼까 다시 생각해 본다. 목표치를 세우고 그에 따라 운동을 한다는 것은 결국 몸을 통제하고자 하는 내 욕망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반증이다. 운동을 하는 이유가 단지 사회로 ‘복귀’했을 때 생산적인 내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그로 인한 인정만을 쫓는 것은 아니었으면 한다. 누군가를 위한, 무언가를 위한 생산성에 내 몸을 모두 던지지 않기를 바란다.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의 몸이 매일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때로는 열심히 챙기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관망하는 태도도 꾸준히 연습해야 할 거다. 나를 위한 몸의 생산성이 무엇일지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 아서 프랭크는 책에서 말한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다     


나는 이제야, 시작한 것 같다.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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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n Gould   "Variations Goldberg" (글렌 굴드, 골드베르크 변주곡) 


다른 곡들처럼 유튜브 링크를 걸어서 소개하고 싶었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재생할 수 있는 동영상을 찾지 못했어요(유튜브 프리미엄 서비스에만 해당하거나 유튜브에서만 재생 가능한 곡이 있더라고요). 이 책을 두 번째 읽을 즈음 즐겨듣었는데, 아서 프랭크도 이 곡을 들으며 위로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괜히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혹시 아직 듣지 않으셨다면 추천드려요! 아침을 시작할 때 들어도 괜찮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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