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늬바람 Apr 01. 2020

일상의 습관이 깨질 때.

아, 대상포진...

그냥 두드러기일거야.

그냥 두드러기일거야.

그냥 두드러기일거야.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이 문장만 반복해서 내뱉었다. 마치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마냥. 어쩌다 건조해서 생긴, 평범한 두드러기이기를 바랐다. 그 이상은 안돼, 그러면 안되는 거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등에 두드러기가 났는데, 대상포진 같기도 해서 혹시나 해서...’

‘누가 봐도 대상포진이네요.’     

 

하아. 수없이 외친 마법의 주문은 효력 따위 없었다. 역시, 대상포진이었다. 어젯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의 두드러기를 발견하고는, 대상포진일 것 같다 싶었다. 거울에 비친 등에는 빨간 수포들이 번져가고 있었다.      


‘왜... 대상포진이 생긴 걸까요?’

‘최근 평소에 하던 운동을 중단하셨나요?’

‘네... 요즘에 못 챙기긴 했어요.’

‘요즘 외출이 어렵고 운동하기도 쉽지 않아서, 면역력이 낮아졌던 것 같아요. 일상적으로 하던 습관들이 깨지면서 몸이 바로 반응한 것 같아요. 사르코이드가 면역력이 낮아 생기는 질환이라 아마 더...’


이렇게 바로 반응한 거냐, 몸아. 아마도 ‘바로’는 아니었겠지. 내가 또 바보같이 늦게 눈치를 챈 거겠지. 일상을 유지하던 습관이 깨졌던 것을 몸 역시 알고 있었다. 몸이 보낸 신호에 나는 몸에게 또 미안해졌다. 그리고 혹시나 대상포진 때문에 폐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JJ와 S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S는 드레스 코드를 제안했고, JJ는 저녁 메뉴를 소개했다. 나는 디저트류를 준비해 가겠다며 신나 했다. 약속 시간이 점심 이후라 혹시나 해서 일어나자마자 병원을 찾아갔다. 약을 타 돌아가는 길에 허탈한 마음으로 둘에게 문자를 보냈다. 대상포진이라고. 하하. 지금 나에게, 또 생길 질환이 있단 말인가.      


-      


‘대상포진’이라는 확진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너무나 알 것 같았다. 최근 2주 동안, 나의 일상을 만들어 오던 습관들이 하나둘씩 삐거덕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즐겨 읽던 책도 펼친 지 오래되었고, 아침을 열어주던 음악도 멈추었다. 오전 8시 전에 먹어야 하는 약 시간을 놓칠 때도 종종 생겼고, 약을 먹으며 건네던 인사도 생략할 때가 많았다. 도중에 몸이 아파 매일매일 해 오던 스쿼트도 잠시 중단했다. 매일을 기록하던 노트에 빈 공간이 생겨 버렸다. 약 3개월 동안 나의 일상을 채워주던 습관들이 최근 2주 동안 굴곡을 그리며 무너져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았기에 의사 선생님이 ‘일상의 습관이 깨져서’ 생겼을 수도 있다고 했던 말이 가슴에 훅하고 꽂혔다. 이제야 다시 하나둘씩 잡아가려던 찰나였는데.

 

이유는 ‘집’ 문제였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전월세 보증금 지원센터에 가서 상담도 받아보고, 인터넷과 유튜브를 뒤져가며 정보를 찾아보고, 은행 대출 창구를 수없이 방문하며, 연락하기 어려운 임대인과의 소통에 스트레스가 높아져만 갔다. 알면 알수록 세입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법에 화가 나기도 하고 현실적인(경제적인) 문제를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음에 답답함이 커져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염증이 나아지는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스트레스는 커져만 갔다. 바로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왜 하필 지금인가에 대한 답 없는 물음만 자꾸 뱉었다.      


‘집 문제는 하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주변 친구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집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걸 넘어선다고. 만약 다른 누군가가 나와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면, 나 역시 했을법한 위로였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거대한 현실 앞에 위태롭게 서 있는, 아무것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과 나에 대한 자괴감이 한동안 나를 에워쌌다.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내 책임이었다. 해결할 수 없는 내가 미웠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지금이 원망스러웠다. 부모님은 괜찮다 했지만 그래서 괜찮지 않았다.  

    

-


한동안 나를 붙잡고 있던 긴장감이 한순간에 풀려서일까, 그래서 대상포진이 생긴 걸까. 어떤 이유든 어쩔 수 없다. 어찌할 수 없는 또 다른 몸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관망할 수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제시간에 약을 챙기고, 연고를 발라주는 것 밖에는 없다. 나머지는 몸의 경이로움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의 통증이 더 심하게 발전하지 않고 머물러만 주면 참 좋겠다.


4월의 시작은 좀 더 경쾌하길 바랬다. 대상포진을 경쾌하게 바라보긴 어렵지만, 익숙해져서 놓치고 있었던 몸을 챙기는 일상의 습관을 다시 만들어가는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분간 아침 운동은 없다. 스쿼트도 62일 차에서 멈추었다. S는 아프지 말고, 멈추지 않고 100일까지 갔으면 좋겠다. 대신, 스테로이드들에게 친구가 생겼다. 스테로이드 알약보다 덩치가 큰 항바이러스제와 신경통 약들을 줄지어 먹는다. 오랜만에 소리 내어 ‘잘 부탁해’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잊지 말고 매일매일 인사해야지.

                

하루에 5번 또는 6번. 잘 닿지도 않는 부분에 난 수포에 연고를 바른다. 이렇게 등을 자주 쳐다볼 때가 있었나. 처음에는 환부만 보다가, 금세 등 전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등이 이렇게 생겼었나. 바디로션을 바를 때도 잘 닿지 않는 등이라 귀찮아서 넘어갈 때가 많았는데, 다 낫게 되면 꼭 꼼꼼하게 발라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오늘 아침, 문득 연고를 바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눈에 보이기에, 너무 잘 보이기에, 매번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내 폐도 그랬으면 좋겠다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그래서 오늘도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폐를 보며 혼자서 말을 걸어 본다. ‘잘 지내고 있니?’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

Ella Fitzerald & Louis Armstrong,   "April in Paris"  (Ella and Louis, 1956)


이번 곡도 링크를 걸어 영상과 함께 소개 드리기 어렵네요. 엘라 핏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의 듀엣이 무척 다정한 곡입니다. 엘라와 루이스가 함께한 곡들을 좋아하는데, 4월의 첫날에 들으면 어떨까 싶네요. 나른하고 기분좋은 봄의 오후에 어울리는 재즈곡이에요 :)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의 몸을 긍정한다는 것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