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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Apr 13. 2020

덕분이에요, 좋아졌어요.

질병을 살아내는 힘, 돌봄. 

“약, 열심히 드셨어요?” 

“아, 네...”      


동그란 두 눈이 인상적인 의사는 여전히 마스크를 착용한 채 물었다. “약 열심히 드셨어요?” 뭐, 내가 약을 열심히 먹지 않으면 어쩌겠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요즘 불규칙적으로 먹어서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열심히 먹었냐고 물어보다니. 시끄러운 마음의 소리를 다 내뱉지 못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저 “네”라고 대답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좋아졌어요.”

“... 아, 그래요?”      


열심히 약을 먹었는지 물어본 이유가 그제야 밝혀졌다. 의사는 12월에 찍은 폐 CT 결과와 4월 초에 찍은 결과를 비교하며 폐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여기, 림프절염이 옅어진 게 보이죠... 그리고 여기 보면 혈관이 정상의 모습으로 많이 돌아온 것도 보일 거예요.”      


의사는 두 촬영지를 번갈아 보여주며 좋아진 부분을 마우스 커서로 원을 그렸고, 나는 움직이는 화살표를 따라 화면에 보이는 내 폐의 변화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눈앞에 보이는 흑백 화면이 몸속 폐임을 상기하며 좋아졌다고 가리키는 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저게 좋아진 모습이구나...’ 너무 조용한 탓이었을까. 의사는 CT 촬영지 결과가 적힌 부분을 읽어 주었다.      


이거 봐요, ‘much improved and... ’라고 되어 있잖아요.
'much' 좋아진 거예요.     


저 결과가 진짜일까,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그런 거겠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다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는 내가 지금껏 스테로이드를 복용한 기간을 손가락으로 세더니, 6개월은 지금의 양을 유지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스테로이드 네 알. 그리 고용량은 아닐 수 있지만, 덕분에 약해진 면역력에 대상포진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용량.      


멍- 한 느낌이었다. 유육종증을 확진받고 가장 기다린 일이었다. 매달 찍은 엑스레이에서 염증 크기는 늘 제자리였고 언제쯤이면 나아질까 싶었다. 대상포진까지 걸려버려 몸이 더 나빠진 건 아닌지 걱정을 하던 찰나 처음으로 회복의 조짐을 확인했다. 소리 내어 좋아졌다고 이야기해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는데, 그 말을 꺼내면 다시 나빠질까 봐 소리를 아꼈다. 


병원을 나와 약국에서 35일분의 약을 처방받고 버스에 올라타서야 가족에게 가장 먼저 좋아졌다는 사실을 알렸다. 얼떨떨한 기분에 내가 무슨 버스를 탔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지나서야  버스를 반대 방향으로 탔다는 것도 깨달았다. ‘정신 차려!’ 짧게 나에게 외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재차 확인하고 그제야 제대로 올라탔다. 친구들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좋아졌다는 사실을 알렸다.      


-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짧지만 길었던 지난 4개월이 머리를 스쳤다. 몸이 아파 휴직을 결정했고 조금씩 적응할 즈음 ‘코로나 19’가 확산되었다. 이미 유육종증이라는 폐 기저질환이 있기 때문에,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상태가 더 나빠질 것 같아서 겁이 덜컥 났다. 떠돌아다니는 가짜 뉴스에도 몸과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모두 취소하고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해가며 조금씩 마음을 챙겨갈 즈음 대상포진에 걸려 규칙적으로 하던 운동마저 놓아버리게 되었다. 좋아질 게 있나 싶었을 때, 몸은 나에게 ‘잘하고 있어’라는 신호를 보였다. 

     

그렇게 시간을 돌이켜 보고 기억에 남는 순간순간을 떠올려 보니, 그 순간을 함께 만들어 준 사람들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유육종증에 걸렸다고 알렸을 때 힘내라고 응원해 준 많은 지인들, 묵묵히 그러나 따뜻하게 걱정해주는 가족, 병원 정기검진 결과에 함께 걱정해 주고 기뻐해 준 친구들,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알렸을 때 큰 관심과 지지를 보여준 사람들, 몸이 아프다니까 한달음에 걱정해주고 맛있는 것을 대접하고 자신의 곁을 내어준 사람들의 얼굴과 말, 보내준 메시지 하나하나가 모두 떠올랐다.    

  

-

유육종증은 나에게 찾아온 것이고, 내 몸의 변화이고, 그것을 마주하는 것은 나이지만 결코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느슨하면서도 단단한 관계들이 함께 이 질병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좋아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감사한 대상은 폐와 몸이었지만, 이 몸은 나 혼자 힘으로 버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연결된 사람들이 보여주고 보내준 마음을 ‘느슨한 돌봄’이라고 한다면, 나는 꽤 많은 사람들의 돌봄과 함께 질병을 살아내고 있었다.       


고마움이 샘솟았다.


그러면서도 주춤거렸다. 아직 약도 더 먹어야 하고, 더 회복되려면 한참 멀었는데 너무 이르게 기쁜 마음을 갖는 게 맞을까 싶었다. 하지만 고마움은 얼마든지 표현해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래, 내가 느끼고 싶은 만큼 느끼고 표현해도 없어지지 않을 그런 감정. 표현해도 아깝지 않은 나의 마음.      


『아픈 몸을 살다』의 저자 아서 프랭크는 질병의 경험에서 ‘내 것’과 ‘내가 남들을 통해 살아낸 것’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이 없음을 말한다. 내 질병의 경험 역시 마찬가지다. 밀착된 돌봄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느슨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돌봄이 나의 삶을 구성하고 있었다. 지금을 살아낸 힘이 타인과의 관계이자 돌봄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삶을 넘나들며 느슨한 돌봄을 건네고 있을까.     


-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일상이 예전과 같지 않다. 돌아갈 수 없는 일상을 뒤로하고 앞으로 살아내야 하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야 한다. 불안과 불확실함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으로 때로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도 있지만, 그와는 다르게 끊임없이 돌봄의 연대를 시도하는 모습도 있고 이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질병을 마주하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준다.      


같은 전단지가 꽂혀 있는 벽.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드문 시간에 산책을 한다.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 집 근처 골목골목을 구경하는 것이 산책의 전부지만 어제와 오늘의 풍경이 다르다. 신기하게도 그 시간대에 종종 전단지를 한 움큼 들고 가거나 우편함에 전단지를 꽂는 사람들이 보인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똑같은 전단지가 우리 집 우편함에도 꽂혀 있다. 동네마다 꽂힌 같은 전단지를 보며 그곳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하루를 그려 본다. 다들 어떻게 지금을 보내고 있을까.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알 수 없지만, 랜선으로 종종 서로에게 힘이 되는 모습들은 많이 보게 된다. 집콕 챌린지를 영상으로 올리기도 하며, 자칫 지칠 수 있는 요즘을 어떻게 보내는지 기발한 방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예전이었으면 상상할 수 없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상을 만들어가려는 개인들이 서로의 창구에서 만나 서로를 챙긴다. 내가 휴직을 시작한 이후 나의 일상을 어떻게 일구어갈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변화된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고 행동한다. 신기하다. 질병은 우리의 삶을 속절없이 제한하고 두려움을 갖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힘을 발산하기도 한다. 


재난은 때로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만 때로는 놀라운 해방을 불러와, 우리의 다른 자아를 위한 또 다른 세상을 보게 해 준다. 평소의 구분과 양식이 모두 파괴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형제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려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의식과 유대감은 혼란과 두려움, 상실과 죽음 속에서도 기쁨을 가져온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믿는다면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 레베카 솔닛 -    

  

나의 유육종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스테로이드 복용량을 줄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약해진 면역력 탓에 대상포진이 나아지는 속도도 더뎌 등과 가슴에 남아있는 신경통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더욱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도 늘 존재한다. 기저질환이 있는 나에게 바이러스 감염은 더 높은 층위의 위험이다. 그럼에도 어제와 같은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점점 좋아지고 있을 거라는 믿음과 그 믿음을 단단하게 채워주는 관계들이다. 그리고 내가 일상에서 발견한 그 관계의 힘을 지금의 사회에서 조금씩 인식하게 될 때, 나와 우리의 질병이 가능성으로 변화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고, 믿는다.      


산책을 하며 만난, 봄.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종현 "U & I"  (종현 소품집 `이야기 Op.1`, 2015년)  

가사에 귀를 기울이며 듣기를 추천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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