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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Jun 16. 2020

동등한 마주함을 생각하며   

아직 읽지 않았다면: 당신 곁에 있습니다 /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잠에 들기 전 노란 조명 아래 책을 읽는다. 마치 잠에 드는 의식과도 같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그리고 가끔 건너뛸 때도 있다). 스마트폰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동영상의 유혹에 걸려들어 한참을 보다가 문득,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언제까지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 약속이 깨지기 전까지 지켜보자 다짐했다. 처음에는 시집을 들었고 두 번째로는 선물 받은 책을 들었다. <당신 곁에 있습니다>를 자기 전 읽게 된 이유는 한 번에 모든 내용을 다 읽고 싶지 않아서였다. 추운 겨울날 이불 아래 하나씩 까먹는 귤이 달고 맛나듯이 그렇게 조금씩 훑어보고 싶었다.      


<당신 곁에 있습니다>는 임종진 님의 사진 치유 에세이집이다. 당신을 ‘사진치유자’로 명명하는 사람. 사진이라는 행위를 통해 만난 사람과 삶에 대한 순간들을 소중히 살피고 반추하는 사람. 곁에 있겠다 다짐하면서도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기억하는 사람. 책을 읽다 보면 임종진 님이 만난 사람들을 만나고, 걸었던 길을 걷고, 사진으로 담아낸 순간에 머물게 된다. 따뜻해지기도 하고 뭉클해지기도 하며 어떨 때는 숙연해지기도 한다. 읽으면서 그리고 보면서 가장 많이 했던 행위는, 나도 모르게 웃게 되었던 거였다. 사진으로 만난 사람들이 웃을 때면 그저 따라서 웃게 되는 거였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이 견고하게 쌓은 벽돌이 툭 건드린 손가락 끝에서부터 힘없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찌할 수 없는, 속수무책과 같은 웃음.      


책을 읽어 보시면 아마 금방 느끼실 겁니다. 당신이 그저 또 다른 ‘우리들’이고 나처럼 일상의 평온함에 헤벌레 웃거나 자기 삶 안에서 일상을 가꾸는 사람들이라는 걸요. (11쪽)       


나와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노란 조명과 어울려 안온함을 가져다주었다. <당신 곁에 있습니다>는 유육종증을 진단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그 만의 방식으로 나를 ‘살피는’ 글이 되어 주었다.      


 

갑작스런 이웃과의 이별이 아쉬워, 최선의 위로로 닭 한 마리를 요리하고 있는 모습 (25쪽) 캄보디아 벙깍(Boung Kak) 호수* (오른쪽)


2003년 이라크에서 만난 친구 카심이 “너는 참 좋은 시선을 가졌다”라고 했던 말처럼, 1998년 방문했던 북녘 땅에서 만난 북측 안내원이 “림선생! 찍고 싶은 대로 다 하시라요! 한번 믿어보갔습네다!”라고 통 큰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던 것처럼, 책에 실린 사진들은 놓치기 쉬운 하지만 붙잡고 싶은 순간과 사람, 시선이 가득하다. 사진에 담기는 대상자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려 끊임없이 고민하기에 독자인 나는 그들과 나 사이에 카메라가 있었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런 적이 있다. 예전 가까운 지인이 사진을 즐겨 찍었는데 신뢰하는 사이여서 나는 카메라 렌즈를 보면서 동시에 너머의 그를 보았다. 그런 경험일까. 경계가 허물어지고 우위가 사라지며 믿음이 싹트는, 그랬기에 가능한 동등한 마주함이란.      


‘동등한 마주함’이란 생각 때문에 엉뚱하게도 <당신 곁에 있습니다>와 함께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사진을 담고 있는 책이란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지점들이 없을 것만 같은 두 권의 책이 동시에 생각나는 게 조금 의아했다. 독자의 특권이랄까, 제멋대로 해석하기는. 아마도 사진을 잘 모르는 나이기에 할 수 있는 ‘이음’일지도.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는 일본의 호시노 미치오 님께서 알래스카의 자연, 동물, 사람에 대한 글을 쓰셨고 사진으로 풍경을 담으셨다. 처음에는 책에 담긴 압도적인 알래스카의 대자연에 눈을 떼지 못했다. 코로나 19로 집에만 있어야 하는 나의 여기와 알래스카의 거기는 무척 대조적이라 꼭 상상 속의 어딘 가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아마도 그건 알래스카라는 곳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이었을 거다. 꽁꽁 언 산과 땅, 바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사계절을 보내면서 달라지는 풍경과 야생동물들의 움직임을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았다. ‘여행을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그 지방의 풍경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261쪽)’고 말한 것처럼 그는 알래스카에서 누군가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경험하고 시간을 보냈다. 점점 호시노 미치오 님이 쓰신 글에 더 머물게 되었다.      


20여 년간 알래스카를 머물며 담은 풍경을 소개하며, 이 풍경들이 기후위기로 인해 점점 변화해가는 안타까움을 표했다. 또한 알래스카로 더욱더 가열차게 유입되는 자본주의라는 풍랑을 맞아 위태롭게 갈라지는 공동체의 모습을 염려하며 덧붙였다. 그럼에도 자연의 흐름에 유연하게 맞서는 멋진 친구들의 소개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그 대상에 대한 흔들리는 고민을 내비치면서 보이는 사진들이 무척 귀하게 느껴졌다. 어떤 풍경들은 이제 찾아보기 어려운 과거가 되었을 생각을 하니 더욱더.      

그리즐리 엄마와 아가들 (79쪽) 호시노 미치노 님은 '이렇게 따뜻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오른쪽)


‘호시노 씨는, 같은 지구 상에 사는 한 생물에 불과한 인간으로서 동물과 혼연일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에서는 전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와 동물 사이에는 거리가 없고, 그 결과물인 사진을 보는 우리 역시 그 사진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의 해설 중에서, 256쪽 -      


오오바 미나코 님이 쓰신 해설을 읽다가 이 부분에서 나만의 엉뚱한 이음에 대한 힌트를 찾았다. 대상과 카메라 사이에 거리감이 없어 나는 어느새 사진 속 풍경에 서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서 그 풍경을, 무스를, 카리부를, 티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아아, ‘동등한 마주함’을 열심히 고민하는 사람의 사진들이어서 그랬나 보다. 엉뚱한 생각에 조금 자신이 생겼다.      


모두 올해 2월에 선물 받은 책이다. 다른 방식으로 나의 일상을 살펴주는 글과 사진이었다. 이 두 권의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의 밤은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잠에 드는 의식에 동참해줄 책을 여전히 찾지 못해서이다(그리고 스마트폰 동영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흑흑). 자연과 사람, 삶에 대한 사유를 놓치지 않는 글과 사진을 다시 발견하기를 바라며 아주 늦은, 그러나 늦지 않은 서평을 쓴다. 씀으로써 책을 선물한 이에게 얄팍하게나마 고마움을 대신해 본다.



* 캄보디아 정부의 재개발 정책 때문에 벙깍(Boung Kak) 호수는 메워지고 호숫가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강제철거를 당했습니다.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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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 Peplowski "I'll string along with you"

<당신 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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