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서평
일을 쉬고 있는 나에게 친구는 잡채를 좋아하냐며, 나눠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따뜻한 온기가 아직 배어 있는 음식과 함께 책 한 권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이 책을 읽고 돌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나에게 신선한 채소들로 만든 든든한 음식을 선물하고 싶어 졌다고 했다. 고맙다고 잘 먹겠다고 친구에게 다짐하듯 얘기했고 서로의 몸과 마음을 잘 챙기자는 말을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뜨거운 태양이 땅을 달구어 열기가 아른거리는 5월의 오후, 나는 갑상선 오른쪽에 석회화가 진행된 것을 발견하고 조직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는 그날 그렇게 나에게로 왔다.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나이/듦, 질병, 돌봄, 노년, 세대, 시간, 죽음 등을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문제화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의제화하고자 하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이 기획한 책으로 네 저자의 절절한 경험과 연구의 통찰이 사려 깊게 담겨 있다. 책은 크게 시민성과 돌봄, 돌봄을 제공하는 보호자와 돌봄을 받는 ‘병자’, 젊고 아픈 사람과 노년, 치매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쓸모’ 있는 사람이 인정받는 습속이 익숙한 사회에서 사회적 질서 바깥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순간들이 흐르고 넘쳤다. 그중에서 저자 전희경이 집필한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이란 챕터에서 나는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경험을 모아둔 글을 읽으면서 다른 이의 삶에 나의 순간을 포개어 보면서 뜻밖의 위로를 받기도 했고 이상한 기쁨을 얻기도 했다. 출처를 알 수 없었던 막막함과 외로움이 언어를 찾아가기도 했다.
질병을 알아차리고 쉼을 선택하기 전까지 아픔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아픔은 피해야 할 것이나 극복해야 할 것, 늙으면 찾아오는 것이었고, 나는 아픔을 내 삶에서 멀찍이 치워버렸다. 자라면서 잔병치례를 한 적도 없고, 뼈가 부러진 경험조차 없었기에 덜컥 알게 된 ‘질병’은 의뭉스럽고 두려운 대상 그 자체였다. 의사는 폐에 염증이 자라나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되었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내 몸이 아프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아차렸다.
나의 몸이 경험하고 있는 질병은 폐에서부터 염증이 다른 기관으로 전이될 위험이 있는 유육종증, 다른 말로 사르코이드라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염증이 폐에서부터 자라나 뻗어 가는데 어떤 몸에서는 염증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기도 한다. 내 몸에서는 염증이 폐에서 임파선을 타고 여러 곳으로 퍼져나간 상황이었다.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기 시작했고 당분간 일을 쉬기로 했다. 아프지 않았으면 선택하지 않았을 쉼이었다.
처음에는 아프다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유육종증을 확진받기 전까지 꽤 많은 검사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오진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픔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질병’이라는 것은 부끄러운 거지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건강’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검사를 거듭할수록 병원에 가는 횟수가 빈번해졌고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가까운 직장 동료에게 숨기는 것이 어려워졌다. 예정된 행사를 참여하기 어려워 양해를 구했고 대신 누군가가 나의 자리를 메꾸어야 했다. 내 몫의 일을 해내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내가 아프다는 두려움보다 더 컸다. 아픈 몸으로 노동의 유혹을 끊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기도 했다. 친구는 질병은 알려야 한다며 그래야 낫는다고 말해 주었다. 이제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기도 했고 진심으로 낫고 싶기도 해서 알리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응원이 고마웠고 든든했다. 응원의 화답으로 회복하고 싶었다. 6개월 뒤에 짜잔 하고 나타나 완전히 건강해진 내 몸을 보이고 싶었다.
유육종증은 완벽하게 ‘회복’할 수 있는 성질의 질환이 아니다. 평생 보살피고 간직해야 한다. 사실 어떤 질환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낫거나 죽거나’의 이분법이 아니라 ‘아픈 몸을 살아가는 것’이 삶의 과정일 수밖에 없음을 그 과정을 나와 내 몸이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을 살아가는 몸들의 서사를 읽고 감응하는 것은 내 안에 단단히 자리 박힌 이분법을 깨는 시도였고, 질병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과정이 어떤 모양일지 그려볼 수 있는 실마리였다. 누군가의 아픔을 읽고 내가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는 우월한 위로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픈 몸들이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던 사회의 따가운 공기를 피부로 느끼게 해 주었다. 건강이 정체성으로 요구되는 사회에서 나약한 몸은 환영받지 못하고 취약성은 극복해야 하는 무엇으로 인식된다. 아픈 몸을 보지 못한 나의 시선은 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러한 공기에서부터 출발된 것이 아닐까.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처럼 요즘 질병과 아픔에 대해 다른 사고와 질문을 던지는 책과 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건강권’이나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인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나처럼 또는 나보다 더 오랫동안 아픔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발화하는 장면들이 수면 위로 등장하고 있는 거다. 소수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페미니스트적 관점이라면, 그들의 시도는 ‘건강’이라는 신화를 뒤흔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던 몸의 생산성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되묻고 있다. 부끄럽게도 아프기 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각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주제는 아픈 사람들 안에서만 이야기되고 옮겨 다닌다. 이제 막 발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당연할 수 있지만 이야기가 퍼져나가지 않으면 고립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질병이 부끄러운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질 수밖에 없다.
친구의 조언으로 질병을 알렸던 시기를 되돌아보았다. 낫고 싶었던 열망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순간이 내 시간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 확장하면서 나는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픈 몸을 돌보는 ‘돌봄’이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감응하고 있다. 이는 결국 ‘코로나 19’가 우리의 삶을 깊게 파고들면 들수록, 지금의 사회가 질병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며 서로가 상생할 수 있는 ‘돌봄’이 어떤 형태이면 좋을지 고민하고 시도하는 움직임과 결을 같이한다고 믿는다.
아픈 몸의 서사가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많은 사람이 아파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누군가의 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삶과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나고 있음을 인지하는 새로운 감각이 피어나길 희망하는 거다. 또한 나의 몸과 새로운 대화를 해보기를 제안하고 싶은 거다. 더 나아가 사회의 질서 바깥에 놓였던 존재들을 초대하는 몸짓이자 안전하게 서로의 존재를 보듬고 살피는 공동체를 꾸며 나가고 싶은 따뜻한 시도와 같은 거다.
* 제목 "지금 뭐 하세요? 아프고 있습니다" 는 본문 136쪽에서 발췌했어요. 알퐁스 도데의 소설 <마지막 수업>의 한 구절입니다.
글과 함께 소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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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NE _ "smile more smile more smile more"
* 이 링크에서 노래를 감상하실 수 있어요(모바일에서 가끔 영상이 틀어지지 않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