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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늬바람 Nov 19. 2020

우리 동네에는 주치의가 있어요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서평 

살림의원(살림의료협동조합)을 의지하며 다니기 시작한 것은 유육종증을 진단받고 난 후였다. 그 전에도 몇 번 진료가 필요한 경우 방문하긴 했으나 병원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필요한 검사와 진단은 대학병원에서 모두 마쳤고 약까지 처방받았으나 유육종증이 희귀 질환이라 앞으로 어떻게 이 질병을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물론 나를 담당했던 의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봤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자가면역질환이기에 그도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한 조언들처럼 느껴졌다.      


마침 살림의원의 추혜인 원장님께 진료를 받고 적극 추천해주었던 친구가 있어서 약간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향했다. 음, 지푸라기를 꼭 잡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날을 기억한다. 원장님은 내가 어떻게 유육종증을 진단받게 되었는지, 몸에 어떤 변화가 있어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답답해하는 나의 고민을 말없이 하지만 적극적으로 들어주셨다. 그는 자신도 유육종증에 대해 공부를 좀 해봐야겠다며 어떤 진단이나 처방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말해주겠다며 일주일 뒤 다시 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참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잘 모르겠다는 말에서 끝나지 않고 조금 더 찾아본 후 다시 방문하라는 요청은 마치 이 질병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 나 혼자임이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말해주는 것 같았다. 기댈 곳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때부터였다. 내가 대상포진에 걸렸을 때도, 갑상선에 이상이 있어 조직검사를 하고 수술을 고민하고 있을 때도 찾아가 진료와 상담을 받았다. 스테로이드를 중단하며 생긴 여러 부작용으로 이해할 수 없는 증상들이 몸에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도 어김없이 살림의원을 찾았다. 궁금한 것을 물었고 여러 가능성이나 답을 해주었으며 적절한 처방을 받았다. 어떤 날에는 그냥 들어주시기도 했다. 원장님은 어느새 나의 얼굴을 알아보시곤 요즘의 컨디션에 대해 물어보셨고 나는 처음으로 의사 앞에서 나의 통증이나 몸의 증상, 그로 인한 마음의 어려움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사만 6번. 그동안 사는 동네가 달라지고 다니는 직장이 달라졌다. 병원은 일을 하면서 점심시간이나 잠시 외출을 해서 다녀올 수 있는 곳이었고 잘 모르는 동네이니 인터넷 후기를 보거나 동료들이 추천하는 병원을 간 것이 전부였다. 한 병원을 꾸준히 다니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동네 병원을 다닌다거나 내가 가는 특정 병원이 있다는 것도 나에겐 해당하지 않던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나를 알아보고 나의 안부를 묻는 곳이 생긴 것이다. 그저 한 번만 보고 헤어질 곳이 아니라 다시 방문하기를 요청하고 상담을 하고 진단을 받고 싶어 하는 병원이 생긴 것이었다. 웃긴 이야기지만 살림의원을 다닌 이후로 동네에 대한 애정도 커졌다. ‘내가 사는 곳’이 ‘우리 동네’가 되었고 그 동네에 믿고 갈 ‘병원’이 있다는 거다.       


추혜인 지음 / 심플라이프 / 2020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은 나의, 그리고 여러 명의, 주치의인 추혜인 원장님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의료협동조합을 세우기 위해 동네를 돌아보고 따릉이를 타고 조합원들과 함께 왕진을 다니고 진료실에서 만난 다양한 이들의 아픔에 공명하며 느낀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또한 그가 페미니스트 의사로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차별과 혐오를 경험하고 이에 맞서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한 경험도 솔직하고 담백하게 이야기한다. 책을 읽으며 공감하고 뭉클해지기도 했으며 때로는 함께 분노하기도 했다. 우리 동네 주치의가 풀어놓는 글이니 두터운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기도 하고 뿌듯해지기도 했다. 이거 내가 다니는 병원 선생님이 쓴 책이야, 이렇게 말이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전희경 님은 ‘시민’과 ‘가족’ 사이, ‘시민’과 ‘돌봄’ 사이에 놓은 간극과 공백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32쪽)고 제언한다. 몇 해 전부터 드러나고 있는 한국의 ‘돌봄 위기’에 있어 이를 개인의 영역으로 한정 짓지 않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의 정책만을 탓하거나 혹은 그것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란 생각 역시 피해야 한다. 저자는 ‘대안을 논하고 대안을 만들며 대안이 되기 위해, 각자가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함께 토론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31쪽)’고 말한다. 개인과 집단, 또는 국가 사이에 비어있는 공백을 무엇으로 연결하고 채울 수 있을까. 이해는 되었지만 퍼뜩 그려지진 않았다. 대안이 되기 위해 무엇이 더해져야 하는 걸까. 

 

그러다 ‘아하’의 순간이 찾아왔다. 원장님의 왕진 경험 중 하나였는데, 왕진 때 자원활동가 분들과 함께 다니기도 한단다. 왕진 시 처방전이 필요한 경우, 다시 살림의원으로 돌아가 처방전을 발행하고 인쇄된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약을 타야 한다. 하지만 거동이 어려운 환자와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는 보호자 두 분만 계신 경우라면 처방전을 받고 약을 타는 것이 쉽지 않다. 왕진을 갔던 그날도 보호자가 집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자원활동가인 풀꽃 님이 보호자의 동의 아래에 자신이 처방전을 받아 약을 배달해 드릴 수 있다며 제안하셨다. 아하, 이런 게 돌봄이 가능한 공동체구나. 내가 그리지 못했던 것은 멀리 있는 대안이 아니라 서로가 필요한 것을 채우며 가꾸는 일상이었다. 이처럼 개인과 집단, 혹은 국가 사이에 비어있는 공백은 사람들이 맺어가는 관계와 공동의 돌봄이 유기적으로 촘촘하고 단단하게 연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살림에는, 살림의료복지 사회적 협동조합, 우리마을 주치의 살림의원과 살림치과, 살림건강센터 다짐이 있다. 얼마 전 은평구 역촌역 근처 ‘살림통합돌봄센터’를 세우기 위해 건물을 계약하고 ‘안심하고 나이들 수 있는 마을’을 꿈꾸며 준비하고 있다. 내가 이해한 것이 크게 틀리지 않다면 살림은 개인의 질병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공동의 돌봄이 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고 이를 위한 실질적인 전환을 준비해나가고 있다.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생각만으로도 든든하고, 주변에 자랑하고 싶기도 하다. 


몇 달 전 갑상선 수술을 하기 전, 차고 넘치는 정보를 보다 지치고 두려워 살림의원을 찾았다. 원장님은 초음파와 조직 검사, 대학병원 담당 의사의 소견 등을 들으시더니, 흰 종이 위에 갑상선을 그려 가며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수술을 결정하기 전에 살림을 찾아오고 싶었다고 말씀드리니, 원장님은 수술하고 난 뒤에도 찾아와도 좋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10월 초 수술을 잘 마치고 현재 회복 중에 있다. 수술은 끝났지만 내 몸이 이를 적응하는 것은 지금부터가 시작일 거다. 조만간 살림의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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