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버릴 때 성취감을 느낀다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그런데 어떤 날은 유독 글이 쓰기 싫었다. 글이 쓰기 싫은 날엔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죄책감이 덜 드는 다른 일을 해야 했다. 나는 글을 쓰지 않는 거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책을 폈다. 그리고 좋은 문장을 공책에 옮겨 적었다. 마음속 죄책감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러고 있을 때냐?”
하지만 다른 자아는 ‘네가 뭔데?’라며 짝다리를 짚었다. 왜 나는 내가 하란 대로 하지 않는 걸까. 청개구리 심보 말고 홍 개구리 심보를 가질 순 없나. 나는 죄책감을 잊기 위해 온 신경을 글씨 쓰기에 몰입했다. 그런데 갑자기 손가락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많이 썼나?’ 시간을 보니 이해가 됐다. 2시간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아니. 언제 이렇게 많이 썼지. 나는 남은 한 장을 다 채우고 공책을 덮었다. 얼떨결에 공책 하나를 다 썼다. 어…… 벌써 다 썼네? 역시 얇은 노트는 금방 다 써서 좋아.
성취감은 무언가를 얻을 때 느끼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잃을 때 느끼는 감정 같다. 예를 들어 볼펜 하나를 다 쓰고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릴 때 쾌감을 느낀다. 동그란 통에 들어있는 영양제를 다 먹고 남은 빈 통을 쓰레기통에 버릴 때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잃으면 성실해지는 느낌이 든다. 성실하게 산 자만이 꾸준히 비우고 채우고를 반복하니까. 사라지지 않는 것은 마음먹고 버려야 하기에 번거롭다. 나는 그래서 볼펜이나 공책 같은 소모품을 더 좋아한다. 소모품은 일정량을 사용하면 알아서 없어진다. 사라지면 또다시 채워야 한다. ‘부지런한 번거로움’을 주는 소모품이 좋다. 볼펜이나 공책, 스티커 따위의 물건이 좋다. 걔네들은 손에 묻은 점토처럼 질척대지 않고 쿨하게 구니까.
그래서 내가 글을 쓰는 지도 모르겠다. 버리고 싶은 과거를 책에다 옮기고 싶어서. 나는 간혹 내 기억을 책에 다 버리고 싶다. 나뒹구는 라면 스프처럼 내 기억도 언젠간 버려야 할 존재 같다. 정말로 번거로운 건 이런 종류일지도 모른다. 버리고 싶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어서 버릴 수 없는 무형의 것. 그래서 내가 더욱 소모품을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버리고 싶은 기억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말로 비워야 할 건 비우지 못하고 엉뚱한 물건들만 닳아간다. 언젠간 내 머릿속 슬픔 저장소의 용량도 우리 집에 있는 생수처럼 조금씩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버릴 때마다 무형의 슬픔을 버리는 상상을 한다. 버림으로써 성취하고, 성취감을 느낀다. 잃으며 위안을 받는다. 사랑을 메우기 위해 오늘도 무언가를 버린다. 비워야 또다시 채울 수 있으니까.
책상 위에 물 컵이 있다. 오늘은 몇 잔의 미움과 몇 잔의 사랑이 채워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