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학용 Nov 08. 2020

#8 극한의 하루를 살아내는 힘

라마유르 히말라야 트래킹 3일째 

히말라야의 아침은 사랑스럽다. 땅과 하늘이 푸른 명암을 얻고, 밤새 숨죽이던 산들과 냇물은 세상 처음인 것처럼 속살의 소리를 지상에 던져놓는다. 하지만 우리들의 그날 아침은 사랑스러울 수만은 없었다. 누군가는 떠나야 했고 누군가는 남아야 했던 아침. 우리들은 하나의 이별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네 명의 아이들이 레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우리 팀의 대표 거북이 유진과 우현. 그들은 트래킹을 포기한다는 아쉬움보다는 그 힘든 고통이 끝났다는 기쁨이 커 보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반면 수경과 솔지는 그들 앞에 놓인 하얀 오르막길과 설산 봉우리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무엇이, 그들로부터 눈물을 밀어내게 하는 걸까. 


그렇게 헤어짐을 앞두고, 마지막이 될 우리들의 히말라야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안녕. 짧은 인사와 함께 네 명은 뒤를 돌아 레를 향해, 나머지 열두 명은 설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아침이지만 발걸음이 무겁다. 힘겨운 결정이었다. 더 오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돌려보내는 일은 내 적성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야 했고, 그 결정은 리더인 나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도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쉬울 터였다. 그럼에도 지난밤 아이들이 던져둔 언어들이 머릿속을 헤집다가 발걸음 앞에 툭툭 굴러 떨어져 차이는 것은 또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반대로 아라와 진실을 끝까지 동행하기로 한 것 역시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특히 진실의 상태는 다소 심각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본인의 의지가 너무나 간절했기에 나와 가이드 지미의 고민이 깊었다. 말하자면 그날 우리들은 경계에 선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세상살이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안전함과 모험의 경계는 사실 뚜렷하지 않다. 어디까지가 용기이고 어디서부터가 무모함인가? 


많은 경우, 오직 결과가 그 답을 대신하기도 한다. 결과에 따라서는 신중함의 대가로 용기 없는 자로 인식되고, 용감한 도전이 무모함이 되어 사회적 지탄을 받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 여러 삶의 자리에서 대체로 모험과 도전의 길을 선호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아이들에 대한 판단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다. 

히말라야 라마유르 트래킹 3일째-꼰제 라를 향하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시야에서 레로 복귀하는 아이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다 함께 트래킹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부디, 돌아가는 길, 그들만의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의미가 함께 하기를.      


아침에 일어났는데 숨이 너무 찼다. 가만히 있어도 진정되지 않았다. 약을 먹고 아침을 먹으려는데 온 몸이 다 저린 것이다. 어제저녁부터 계속 토할 것 같은 증상도 계속되었다. 레로 가야 하나 계속 트래킹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였다. 삼촌께서 아쉽지만 레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하셨다. 택시를 타고 레로 돌아가는 길은 정말 끝도 없었다. 레에 도착하니 여행사 아저씨께서 나와 계셨다. 우리를 껠라쉬 게스트하우스에 데려다주셨다. 오랜만에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얼마나 개운한지 행복했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솔지)     


수경 언니랑 솔지 언니랑 우현이랑 넷이서 빨래를 했다. 트래킹 할 때 절대 갈아입지 않은 옷을 빨래 통에 넣고 세제 넣고 밟았는데 처음 2번은 땟물이 하도 심해 흙탕물보다 더 더러웠다. (중략) ‘강남스타일’을 틀어놓고 춤추면서 빨래를 밟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늘로 인해 우현이를 나의 댄스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엄마한테 전화했다. 엄마가 엄청 반가워하면서 “오 유진아, 히말라야 꼭대기까지 올라갔어?”라고 해맑게 물어보시는데 차마 트래킹을 포기했다고 얘기 못했다. 엄마 미안. 너무 힘들었어요. 엄마 딸은 서유진이지 엄홍길이 아니잖아. 미안해요.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유진)     


고도가 많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산은 더 푸르러지고 있었다. 빙하가 녹은 물이 냇물을 이루었고, 그로 인해 풀과 작은 나무들이 생명을 얻는 모양이었다. 4명의 거북이를 돌려세우고 나니 대열의 속도가 빨라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이 가파르게 이어지면서, 어김없이 ‘고통’과 ‘희열’의 대조적 감정이 반복적으로 찾아든다.


길을 오르는 발걸음 수만큼 산소의 수량이 부족해짐을 느끼고, 그리하여 또 그만큼의 고통이 더해지지만, 그렇게 오른 자리에서 돌아보는 풍경은 여행자의 말문을 완벽하게 막아버린다. 그 명확한 아름다움 앞에서 가슴 한 편이 뻐근해진다. 고통과 희열이 반복되는 동안 선두와 후미의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진다. 그 누구도 스스로의 페이스에 발걸음을 맞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극한의 고개를 넘을 수 없을 것만 같다. 


얼마나 걸었을까. 신기루처럼 멀게만 보이던 설산 머리가 코앞으로 다가서면서 산비탈의 기울기는 45도를 넘어 날카롭게 곧추섰다. 따라서 길은 뱀처럼 구불구불 돌며 천천히 고도를 높이며 나아갔다.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선두 4인방 다람쥐들(예인, 남수, 정민, 민아)이 45도가 넘는 산비탈을 직선으로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 길은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당나귀가 만들어놓은 길이다. (그로부터 3일 후. 우리들이 트래킹을 마치고 레로 돌아갔을 때에 여러 국적의 여행자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떠도는 소문 하나가 있었으니, 요약하자면, 한국에서 온 어린 청소년들이 당나귀 길(Donkey Road)을 타고 ‘꼰제-라’(Konzke-La) 정상에 오르고도 멀쩡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다.) 

라마유르 트래킹 3일째-꼰제 라를 향하여 2

반면 후미에서는 진실과 아라가 고산증이 점점 더 심해짐에 따라 주저앉고 걷기를 반복하면서 지미와 함께 까마득한 점이 되어갔다. 또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 역시 고통이 최고조에 달했을 즈음, 오직 거칠고 반복적인 내 숨소리만 위안이 되던 순간에, 마침내 해발 4900미터 ‘꼰제-라’(Konzke-La)에 마지막 발걸음을 올려놓았다. 


강하고 거침없는 바람이 얼굴로 불어왔고, 룽가(티베트 불교의 경전이 적힌 깃발)가 춤을 추었다. 푸른 빙하가 반사시킨 태양빛이 작심하고 달려들었으며, 발아래 작은 돌무덤에서는 야크들의 머리뼈가 통째로 굴러다녔다. 낯설었다. 그리고 황홀했다. 팔을 벌리고 오페라의 배우가 된 양 360도를 빙글빙글 돌아본다. 오늘 하루 내가 걸어온 길들이 까마득하게 달려오고 있다. 


마치 나의 인생에서 내가 지금껏 걸어온 삶의 궤적들인 것처럼 느껴져 어쩐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가쁜 호흡이 목젖까지 차오르고 천근만근이던 발걸음을 하나씩 옮겨서 하늘 아래 이곳까지 올랐듯이, 내 삶도 그렇다면. 혹은 그럴 수 있다면. 이런 감상들에 빠져보아도 부끄럽지 않을 시간. 그 시간을 벗겨내고 맞은편 길에서 당나귀 떼와 몰이꾼들이 올라왔다. 등에 진 짐이 가벼운 걸로 보아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이다. 룽가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는 우리들이 올라왔던 그 길로 내려선다. 일러두자면, ‘꼰제-라’에서의 ‘라 La’는 고개라는 뜻이다. 문득, ‘라 La’의 의미가 그 옛날 순례자들과 상인들이 당나귀를 벗 삼아 넘어섰던 삶의 고통과 희열의 시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람이 찼다. 우리들은 패딩 잠바를 꺼내 입었다. 고산에서는 여름과 겨울이 공존하는 법이다. 아이들은 사진을 찍었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새처럼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아오르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루어놓은 결과를 즐기고 있다. 난 그들을 사진에 담았다. 사진 속 그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고, 내 사진은 그들에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꼰제 라에 서서
오늘은 가장 높은 패스(Pass)를 넘는 날이다. 생각했던 대로 정말 힘들었다. 오르막 길, 오르막 길, 또 오르막 길 ㅠ. 정말 힘든 길이었다. 하지만 꼭대기에 오르는 순간 힘든 것도 다 사라졌다. 내가 지금까지 본 경치 가운데 가정 멋진 경치였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정호)     


30분쯤 후에 진실과 아라가 가이드 지미와 함께 우리들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꼰제-라’에 올라섰다. 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울었다. 펑펑. 그들은 눈물이 범벅인 채로 휴대용 산소통으로 입을 막고 산소를 들이마셨다. 한참 동안 산소를 보충한 후, 그들이 세상에 내어놓은 첫 말이 뜻밖에도 우리를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삼촌, 임용고시요… 한~방이면 합격할 것 같아요.”

“뭐? 임용? 한방?”


다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길에서 몇 번이고 죽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서웠다고 했다. 그래서란다. 이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발 4900미터 고개에서 산소의 흡입 끝에 뱉어낸 그날의 다짐처럼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들은 한 방에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제주도 어느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극한의 고통과 절정의 아름다움은  함께 
숨이 부족해서 깊게 숨 쉬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그 순간 너무 무서웠다. 무서움에 눈물이 났고, 울면 호흡이 더 힘들어졌다. 결국 뒤처졌고 가이드와 헬퍼가 함께 산행했다. 같이 있어도 혼자 힘든 기분이랄까. 혼자만의 외로운 산행 같았고 갑자기 서글픔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높고 험한 돌길을 오르면서 또 그 마지막 숨을 쉬는 느낌을 받았다. 서러움과 힘듦이 다 몰려와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내 옆에 함께 가는 사람이 없다는 서글픔. 나만 이렇게 숨 쉬기 힘들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풍경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헬퍼에게 내 짐을 맡겨야 하는 상황들. 그 모든 상황이 다 힘들었다. 

그때 가이드가 내 맘을 알았는지 두려워하지 말라며 우리들이 너와 함께 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한 마디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 후로 가이드를 의지하며 다시 힘을 내어 걸을 수 있었다. 그때서야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눈 덮인 산과 여러 산맥들이 이어진 절벽들을 재빨리 눈에 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올라갈수록 고산 증세가 심해지고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도 아파왔다.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이 길이 언제 끝날까만 생각 했다. 

마침내 정상을 찍었을 때의 기쁨. 해냈다는 기쁨.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길이 끝났다는 기쁨. 내 호흡으로 올라왔다는 성취의 기쁨. 너무 행복했다. 아라와 나는 ‘우리가 어떻게 올라왔을까’ 이야기하며 산소를 마셨다. 정상에서의 기쁨을 만끽했다. 4900미터 높이에서 본 히말라야의 장관은 너무나도 멋졌고 내려다보는 그 자체가 황홀했다. 내 생애 최고의 극한 체험이지 않을까. 이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어떤 것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진실)     


오늘 4900미터를 올랐다. 무려 1200미터? 1300미터? 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어떻게 올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냥 걷고, 또 걷고, 그러다 주저앉고, 다시 일어서고. 이걸 수십 번 반복. 처음으로 산소를 마셨다. 가이드의 도움이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막바지에는 정말 죽을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았다. 너무 힘들어 눈물이 났다. 그때 상황에서는 아무 생각도 느낌도 없었다. 그냥 가고 싶다……라는 것뿐. 정상에 올랐을 땐, 아…… 그때 기분은…… 말로 할 수가 없다. 내년이면 임용이지만 걱정되지 않는다. 그냥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아라)       


여행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 타인과 타인의 문화를 만나는 일이다. 하지만, 여행은 때론 나를 만나는 일이다. 지금껏 세상에 꺼내놓지 못했던 내 안의 나와 나의 욕망과 만나는 일이다. 내 안에 존재해 왔지만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나의 또 다른 삶을 살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여행자들이 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또 하나의 삶을 다 살아낸 것처럼 피로를 느끼게 되는 것은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날 나는 ‘의문’ 하나를 풀었다. 한 번의 ‘여행학교’를 끝낼 때마다, 나는 다시는 이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곤 한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는 사이 어느새 마음속에서는 다음 여행학교를 가늠하고 있다. 도대체 여행학교의 그 무엇이 나를 밀어가는 걸까? 그 어떤 힘이. 


그러니까 아이들이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호흡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미칠 것처럼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또다시 그들이 한 걸음을 내딛게 하는 힘. 그냥 멈춰 포기해버려도 그만일 것을 또 한 걸음 더 내딛게 하는 그 힘이 아이들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 지금껏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본디 자신이 더 강하고 더 멋지고 더 아름답다는 것. 말하자면 그것 때문이다. 아이들이 그들 안의 자신을 알아가는 이 시간들이 나를 여행학교란 이름으로 지금도 길 위에 서있게 하는 까닭인 셈이다.        


숨다(Sumda) 캠핑장까지는 고개 너머 가파르게 3시간을 더 내려가야 했다. 캠핑장은 ‘천공의 성’처럼 하늘에 떠있었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고고했고, 또 아름다웠다. 먼저 도착해있던 고교 3학년인 문중은 배낭을 옆에 벗어두고서 넋이 나간 듯 앉아있었다. 풍경에 취한 것인지 고산증에 취한 것인지 구별해내기가 어려웠다. 다만 앉은 폼이 여행자의 향기를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히말라야 라마유르 트래킹 3일째- 숨다 캠핑장

나는 우선 다람쥐 4인방을 찾았다. 그들 가운데 중학교 2학년 동갑내기인 정민이와 남수는 몸에 탈이 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어지럽다고 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런 법이다. 객기를 부리며 젊음을 만끽했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반면 민아와 예인은 시종일관 튼튼하다. 이 텐트 저 텐트를 들락거리며 아직 남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힘들어 죽을 것처럼 산소까지 마셨던 아라는 기적처럼 되살아나서 손빨래를 하고 있다. 


그렇게, 트래킹을 떠나 가장 힘들었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구에겐 가는 생애 최고의 극한 상황이었을 그 하루의 시간들이 잰걸음으로 우리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정상에서 기다리라는 삼촌의 말을 무시하고 먼저 떠난 선두그룹 4명. (중략) 드디어 도착 거의 7시간 동안 열심히 걸었다. 감기 몸살 등등으로 빨리 쉬고 싶지만 텐트가 너무 늦다. 머리는 어질어질… 에구구 일단 휴식! (중략)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면서 스스로에 대한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리하게 올라간 것도 있었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천천히 꾸준히 뚜벅뚜벅 걷다 보면 기분 좋은 일이 펼쳐지는 것.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예인)     


제일 높은 산을 넘고 와서 몸이 무리했는지 머리가 띵하다. 너무 아파서 잠이 온다. 오늘은 낙오자가 4명이 생겼다. 이제 내가 왜 아픈지 알겠다. 너무 무리하면서 100미터를 쭉 올라왔기 때문이다. 내일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무사히 트래킹을 마칠 수 있으면 좋겠다. 벌써 3일이 지나갔다. 그냥 아프다. 내 친구 정민이도 아프단다. 만수 아저씨가 준 노트, 아빠가 준 가방, 엄마가 준 볼펜, 형이 준 목걸이. 가족이 준 물건으로 잘 버틸 것이다. -(어린 여행자들의 일기, 남수)
매거진의 이전글 #7 별똥별도 와주지 않는 무심한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