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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e Aug 22. 2023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황궁아파트 사람들

내부의 단결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온다


졸업 작품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을 쓸 정도로 멸망 이후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딱히 극한상황에서의 인간의 본성 ...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다. 모든 것이 멸망한 상태에서 본성이고 나발이고, 그정도로 극한 상황의 스트레스에 놓여있다면 어느 하나 제정신 잡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내가 궁극적으로 궁금해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우리 아파트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갑작스런 재난상황에서 시작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제대로 반영했을까? 지금부터 알아보자. 이 글에서는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황궁 아파트 사람들, 그중에서도 박보영 배우가 맡은 '명화' 역할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먼저 공간적 배경을 말해보자.


| 모든 것의 중심, 황궁 아파트

'어느날 우연히 모든 것이 무너졌다'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주인공 영탁(이병헌)과 민성(박서준)-명화(박보영)가 거주하는 '황궁 아파트'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때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라는 점에서 옛날식으로 지어진 (튼튼한) 복도식 아파트가 떠올랐는데, 그걸 그대로 구현해냈다.

하지만 이 복도식 아파트는 서로를 감시할 수 있는 개방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황궁 아파트


넓은 V자 형식으로 펼쳐진 아파트는 일자로 긴 복도식이며, 옆동을 훤히 바라볼 수 있는 형태다. 황궁 아파트 사람들은 이 복도를 통해 서로를, 생필품을, 의심스러운 행동들을 감시한다. 원 모양만 아니었을 뿐 판옵티콘(*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이나 다름없다.


이로써 배경은 1단계 황궁 아파트 밖-2단계 황궁 아파트 안-3단계 집안으로 나뉘어진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1단계에서 생존가능성을 핑계로 주민과 비주민을 구분짓는다. 영화 초반, 강제 퇴거 명령을 내리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주민수칙을 내세우며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다.


설국열차 속 틸다스윈튼이 되어버린 김선영(부녀회장 금애 役)


황궁 아파트 주민 수칙


1. 아파트는 주민의 것

주민만이 살 수 있다.


2. 주민은 의무를 다 하되

배급은 기여도에 따라 차등 분배한다.


3.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주민의 민주적 합의에 의한 것이며

이에 따르지 않으면 아파트에서 살 수 없다.



내부의 단결을 높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아주 옛날부터 똑같았다. 바로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가상의 적을 만든다. 외부에 적이 있으니 불안하고 공포감이 들지만, 내부에는 '내 편'이 있으니 안전하다는 믿음을 심어주어 결속력은 올라간다. 그리고 그 근원은 아파트에서 온다. 명확히 내것 네것 따질 수 있는 현대인의 최고 물질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장소를 중심으로 한 아포칼립스물을 다룬 여러 작품이 있다. 주로 전국가적 재난상황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생존본능, 극한에 치달은 갈등상황, 그리고 그 안에서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인간의 선택들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영화 <부산행>과 드라마 <해피니스>를 들 수 있겠다. 두 작품 다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공유한다.  


(왼) <부산행> / (오) <해피니스> 포스터


먼저 <부산행>의 경우, 제목처럼 좀비로부터 안전한 '부산'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을 메인 스토리로 가져가는데, <콘크리트 유토피아> 역시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황궁 아파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부산과 황궁 아파트의 장소적 특징(지리적 이점)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 요소인 셈이다.


다음으로 <해피니스>의 경우, 좀비를 피해 들어온 아파트 내부에서 분열이 시작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가장 흡사한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점은 <해피니스>는 신축 아파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옛날 아파트 정도 되겠다. 두 작품 모두 기존 아파트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주민 vs 비주민 사이의 갈등이 심화된다. 특히나 아직까지도 뼈에 새겨진 신분제 DNA를 버리지 못한 대한민국에서는 주민 VS 비주민에서 살아남은 주민이 다시 자가 VS 비자가로 나뉜다. 이는 책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 빈곤층을 대변하는 '주공아파트'가 21세기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건실하게 보여준다.

 



황궁 아파트 사람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902호에 사는 김영탁(이병헌)을 중심으로 비주민들을 모두 쫓아내고 생필품을 확보한다. 그리고 2달 동안 그들만의 안락한 아파트에서 살아남는다. 하지만 슬슬 생필품이 떨어져 나가자,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밖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황궁 아파트는 어느덧 사람 잡아먹는 아파트가 된다.

영탁(이병헌)과 민성(박서준)을 비롯한 주민들은 근처에 남은 슈퍼를 털고, 알음알음 살아남은 이들의 것까지 약탈하며 무리 사냥을 시작한다. 이들은 안전한 보금자리를 뒷배로 사냥을 즐긴다. 죽은 이들의 금니를 털고, 생필품에 눈이 돌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그런 일들에 무감각해지는 모습들이다.



이때쯤 갈등이 일어날 타이밍이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내쫓았던 외부의 사람들은 되려 반격을 시작한다. 김영탁은 앞서 말했듯 외부의 적을 핑계로 내부의 단결을 다지려 하지만, 생각보다 거센 반발에 실패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탁을 의심한 명화(박보영)와 903호 소녀 혜원(박지후)에 의해 김영탁이 황궁 아파트 주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김영탁은 순식간에 내부의 적으로 돌려지고, 황궁 아파트는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갈등의 끝은 파멸 혹은 해결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맨 처음의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이야기를 담아냈을까?




우리는 이걸 문창 전문용어로 '불지르고 끝내기'라고 부른다


문창 학부생 시절, 나와 내 동기들은 글을 쓰다 막히면 흔히 '불지르고 끝내기!'라는 수법을 썼다. 결말을 어떻게 내야할지 모를 때 모든 걸 불태우고 끝내는 거다. 이래도 되는걸까? 당연히 안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갈등이며, 이야기의 끝은 변화다. 사건이든 인물이든 어긋나면서 갈등이 생기고,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내면이든 외면이든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가 생겨야 한다는, 일종의 작문 법칙이다. 하지만 모든 갈등이 해결되는 방법은 인물들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면서도 급작스러워서는 안되고, 인물들의 결핍이 있어야 하나 너무 폭력적인 면만을 강조해서는 안된다. 그러면서도 독자들이 만족할만한, 그러나 뻔하지 않은 결말을 내줘야 한다. 이게 무슨 열림교회 닫힘 같은 소리며 작고도 큰 이야기 같은 소리인가. 그러다 뇌가 과부하를 선언하고 마감기한이 압박해오면 모든 것을 불태우거나, 등장인물을 모두 죽여버리거나, 혹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해버리는 무책임한 짓을 시전해버리는 것이다.


김영탁 (이병헌)


그런데 [ 콘크리트 유토피아 ] 가 [ 불지르고 끝내기 ] 를 시전했다.

모든 갈등의 구심인 김영탁(이병헌),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기꺼이 죽인 김민성(박서준), 그리고 모든 일에 암묵적 동의를 한 황궁아파트 사람들을 죽인다. 폭탄으로, 칼로, 총으로. 끝내 동조하지 않고 공동체적 생존을 주장하던 명화(박보영)만 제외하고 말이다.


나는 이게 '그럼에도 함께 잘 살아봅시다' 의견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는 세계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는 캐릭터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는 '결말 어떻게 낼지 몰라서 일단 다 죽이고, 그렇다고 다 죽이면 양심에 찔리니까 희망삼아 한 명만 살려놓읍시다'로 느껴졌다.

짜임새와 복선(떡밥) 회수 자체는 좋았으나, 이런 이야기는 보다보면 '대체 결말을 어떻게 내려고 그러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결말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놓았으나 마무리가 불지르고 끝내기라서 다소 실망한 감이 있다.




명화의 이야기


불지르고 끝내는 와중에도 명화(박보영) 캐릭터를 잘 뜯어볼 필요가 있다.

명화는 흔히 재난영화에서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죠!'하는 생명중시형 캐릭터다. 극한상황에서 이런 대사를 하는 캐릭터는 주제파악도 모르고 비현실적 논리를 펼치는 답답이로 그려진다. '저런 애가 먼저 죽는다' 라는 조롱을 들으며 말이다. 그런 영화와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간호사라는 직업을 통해 쓸모를 증명했다는 것인데 그것말고는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자고로 전쟁통에 의료직은 우선선발되는 전문인력이니까)


마치 명화의 생명중시가 간호사라는 직업에서 비롯된 거라는 일차원적 연결을 위해 만들어진 설정같다. 물론 직업 가치관에는 당연하게도 그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 있겠지만, 그게 그 사람을 판단하는 모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이게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만나면 그냥 단순하게 간호사니까 → 사람 살리는게 우선이겠지? 라는 사고방식으로만 만들어진 게 티가 난다는 점이다. 이런 지점에서 명화는 단면적인 인물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사람 살리는 직업, 그들이 가진 직업의식, 다 좋다. 간호사가, 소방관이, 경찰관이, 구급대원이 세상 구하는 이야기 다 좋다. 근데 갈등상황에서 극한으로 치달았을 때 이들이 꼭 사람을 살리리만 법은 없으며, 이들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살리고 싶은 사람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마땅히 사람 살리는 일에 관련도 관심도 없던 사람이 재난상황을 맞았을 때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다. 그럴 줄 알았다, 하는 사람이 역시 그런 일을 했다! 할 때보다는 더 중요한 지점 아닐까. 서사 구축에 있어서도 재미에 있어서도 말이다.



영화의 결말부, 지나가던 사람들에 의해 구해진 명화(박보영)은 '그냥 살아도 되는 거냐'며 묻는다. 그러자 한 여자는 말한다.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요?'

사는데 이유가 필요할까? 혹은 살리는데 이유가 필요할까? 역시나 답은 똑같다. 그냥 사는 거지 뭐. 나의 삶의 이유는 남에게 달린 게 아니라는 아주 보편의 원리를, 그러나 잊고있던 이치를 깨달으며 끝이 난다.


절망 절망 절망 그럼에도 미약한 희망으로 마무리하는 이야기는 흔하다. 흔하지만 해야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은 시궁창이어도 환상은 현실과 달라야 하니까. 그게 이야기의 존재 의의다. (내 기준) 리얼리즘으로 마무리했을 때 남는 것은 찝찝함 내지는 기분이 더러워지는 경험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뻔하더라도, 적어도 희망의 여지가 보인다면 그걸로 힘을 내서 살아가는 독자와 시청자들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영화가 '그냥 사는 거죠'라는 대사로 끝났다고 해서 이야기를 '비온 뒤 맑음'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평수 넓은 아파트가 90도로 무너진 걸 보고 '층고가 높죠?' 라고 한 대사가 더 좋았다. 나는 이런 위트를 더 보고 싶었다.




P.S. 903호 소녀 혜원은 어떻게 됐을까?

902호 김영탁의 비밀을 풀어준 혜원(박지후)의 캐릭터 소모는 이루 말할 것도 없다. 비밀이 밝혀지자 혜원은 영탁에 의해 아파트 벽 아래로 떨어진다. 나는 이렇게 끝내는 결말이 너무나 황당해서 소녀가 살았을 확률을 계산해보기로 했다.

설정상 그곳은 주민들의 대소변을 버리는 쓰레기장이다. 주민 200여 명 정도가 최소 2달 이상을 살았으니 그곳에 쌓인 오물의 양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인이 1일에 배출하는 오물을 대략 0.2kg로 잡아보면 200x60x0.2=2400kg다. 부디 2400kg의 똥밭이라도 무사히 안착해 소녀가 목숨을 부지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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