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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소설 <파과> 속 노인/여성/킬러 조각

영화 <파과>를 기다리며

by wee


2025년 5월, 구병모 작가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영화 <파과>가 개봉했다. 원작소설 <파과>를 처음 읽었을 때는 내가 학부생이었던 2018년이었다. 당시에도 나는 작품 속 인물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즐겼었나 보다. 마침 한국문학 수업 과제로 제출했었던 <파과> 메타포 분석 리포트를 발견한 김에, 영화 <파과>를 기다리며 원작소설 <파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본 포스팅에는 소설 <파과> 속 결말까지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노인/여성/킬러 조각이 말하는 메타포


소설을 쓰다. 이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소설이란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작가는 그러한 그릇을 만드는 장인이라고 비유할 수 있는데, 그릇을 만들 때 장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작가 또한 무수히 많은 고뇌와 수정을 통해 자신만의 그릇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거시적으로 사회를 바라보기도 하고 혹은 삶의 파편들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삶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떼어와 물레에 얹는다. 무릇 소설은 작가의 개성에 따라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그것이 표현되는 양상이 다를 터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릇을 만들어낼 것인가. 만들어 낸 그릇에 어떤 것을 담을 것인가.


‘메타포’는 그릇을 만들어내는 과정 중에 존재하기도 하며, 만들어 낸 그릇에 담을 것이 되기도 한다. 구병모 작가는 「파과」에서 다양한 메타포를 통해 노인, 여성, 킬러의 삶을 담아내고, 담아낸 것을 토대로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를 제시한다.



메타포(metaphor)란 숨겨서 비유하는 수사법이란 의미로, 은유 혹은 암유라고도 한다. 이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간접적인 시각화는 독자로 하여금 작품 속에서 암시적으로 드러난 바를 스스로 깨닫게 해주고, 이를 작품 밖의 사회와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작가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는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남매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조각을 뿌린 것과 같아서, 독자는 빵조각 같은 이야기를 따라 작가가 탄탄하고 정교하게 만든 과자 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구병모 작가는 화자를 ‘늙은’ ‘여성’ ‘킬러’로 설정함으로써 그녀의 삶을 보여준다. 낯선 사람에게 어머니, 라고 불린다든가 (어머니라고 불리면 항상 그녀는 ‘나는 그쪽 어머니가 아니에요.’ 하긴 한다) 킬러로서 계속 활동이 가능한지 몸 상태를 체크한다던가 하면서 말이다. 이 삶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녀 자체를 가리키며 어우러진다.


작품의 주인공인 ‘조각’은 열다섯 살에 ‘류’를 만나 청부살인업자가 된다. 류가 죽은 후에도 조각은 혼자 킬러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예순의 나이가 넘어 청부살인계의 대모가 된 조각에게 후배 ‘투우’는 그녀의 일을 방해하며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투우는 사실 그녀가 예전에 죽인 의뢰인의 아들로, 그녀가 왜 자신의 아버지는 죽였지만 자신까지는 죽이지 않았는지, 자신을 기억이나 하는지에 대해 물어보려 한다.



손톱, 무용, 복숭아


작품 속에서 그녀와 동일시되는 메타포는 그녀의 예명인 조각과 손톱, 그녀의 개 무용, 폐지를 줍는 노인, 강 박사네 과일 가게에서 산 복숭아 등이 있다. 이러한 메타포가 모여 응축된 부분이 상한 복숭아에 대한 내용으로, 이는 이 책의 제목인 ‘파과’와도 상응한다. 한 개 먹고 잊혀버린 복숭아는 그녀의 냉장고에서 물러터진 채 발견된다. 작가는 이에 그녀의 삶을 투영하여 상한 복숭아의 잔해를 치우는 그녀의 모습을 그녀를 가리키는 모든 것으로 묘사한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중략)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갈색 덩어리가 되어버린 복숭아, 조각, 손톱이라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여 그녀가 된다. 모든 메타포가 조각, 조각이 되어 그녀를 가리킨다. 그녀는 파과가 되어버린 복숭아의 냄새를 맡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녀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늙고 병들어 외면을 받게 된 복숭아처럼 그녀 또한 평생 동안 킬러로 살아왔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약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의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조각과 무용의 의미

이는 작가가 제시한 다양한 메타포 속에서 섬세하게 드러나는 대상의 명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녀의 예명인 조각과 손톱, 그녀의 개 무용에 집중하여 보자. 조각은 짐승의 발톱과 뿔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하여 주는 물건을 의미하며, 손톱은 이를 쉽게 부른 것이다. 즉 조각과 손톱은 킬러로서의 그녀를 가리킨다.


무용은 그녀와 같이 늙어가는 처지로, 이름 자체는 말 그대로 쓸모없다는 의미지만 알고 보면 ‘꽤 쓸모 있고 똑똑한 녀석’이다. 그녀는 무용에게 노인은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으며 무용과 같은 노견 또한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앞서 언급한 복숭아에 자신을 투영했듯이, 무용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살아 있는데, 처치 곤란의 폐기물처럼 타는 쓰레기 안타는 쓰레기’ 라는 말을 통해 늙고 병든 사람에 대한 사회의 냉철한 시선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은 노인 화자가 말할 수 있는 감정을 더욱 극대화 시켜주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 속 여성 노인의 삶을 그려내다


이렇듯 「파과」는 화자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과 사회가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동시에 제시한다. 사실 현대의 작품 중에서도 「파과」처럼 노인 화자의 시점에서 쓴 작품들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는 보편적인 진리에 따라 사람들은 나이가 들기 전 혹은 나이가 든 후에 이러한 작품들을 읽으며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파과」를 다른 작품들과 구분되게 만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녀가 늙지 않았고,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보통의 동네 노부인’을 모방하며 평범한 사람인 척한다. 그녀는 킬러라는 직업으로 인해 특수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순한 ‘늙은 여성’이 아닌 상태에서 ‘늙은 여성’을 바라보기 때문에 다른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화자가 보편적인 인물로 속하길 바라는 마음을 드러내는데, 이때 그러한 보편성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할 수 있지만 그녀에게는 당연하지 않다는 점에서 당위성을 가지게 된다.


조각은 연민을 통해 보편성을 찾아간다

처음으로 연민을 느낀 대상, 복부인

그녀가 보편성을 찾아가는 과정은 연민이라는 감정을 통해 처음 드러나게 된다. 죽은 딸의 복수를 위해 의뢰를 맡긴 복부인에게서 그녀는 처음으로 연민을 느낀다. 그녀는 예전에 자신의 아이를 탯줄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외 브로커에게 넘기며 그 어떠한 회한도 슬픔도 그리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야 복부인의 눈에서 공허를 발견하고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그녀는 이에 대해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라고 하며 자신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복부인의 의뢰를 실행하기 위해 잠복하던 그녀는 폐지를 줍는 노인에게 노인으로서의 연민을 느낀다.


처음으로 연민을 받은 대상, 강 박사

반대로 그녀는 연민을 받기도 하는데, 그것은 여성으로서, 노인으로서 사회의 사람이 던지는 동정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그녀를 처음으로 연민한 사람은 강 박사이다.


그녀는 자신이 킬러라는 정체를 우연히 알게 된 강 박사를 죽이려고 까지 했으나 따뜻한 연민을 받고, 그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강 박사의 부모와 딸을 보며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스럽다’고 말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단 한순간이라도 그 장면에 속한 인간이 된 듯한 감각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조각의 보편성을 다시 깨버리는 대상, 투우

이때 투우는 그러한 그녀의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 역할을 한다. 투우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니까 생판 남을 봐도 거울 속 나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어? 당신이 이날 이때까지 해온 일과 살아온 방식을 생각하면 그거 너무 뻔뻔하지 않아?’ 라고 말하며 혼자 늙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녀를 꿰뚫어본다. 그는 ‘얼마든지 그 사람(강 박사)를 바라보고 생각할 자유’는 있지만 ‘자격’은 없다며 그녀가 다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한다.


그녀는 다른 청부업자에 의해 류의 가족이 죽고 난 후, 류와 함께 다짐했던 말을 생각한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이는 그녀가 킬러로서 살아오며 보편적인 감정을 버려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강 박사의 가족을 지켜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말았고, 투우가 강 박사의 딸을 납치하자 구하러 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조각과 투우의 결말


조각은 결국 투우와의 치열한 격투 끝에 그를 죽이고, 강 박사의 딸을 구해낸다. 이후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손톱에 네일 아트를 하며 말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녀는 기꺼이 파과로서 살아가겠노라 말한다. 마지막까지 메타포를 던지며 끝나는 작품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리하자면 「파과」는 메타포의 적절한 배치를 통해 화자 내부의 시선과 화자를 둘러싼 세계의 시선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특히 화자가 킬러로서 노인과 여성에 대해 서술한다는 점과 이를 통해 특수성을 가진 인물이 보편성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른 작품과의 차이점이다.


또한 킬러라는 설정은 다소 허구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소재지만, 구병모 작가는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치밀한 묘사를 통해 허구성과 실제성 사이의 간극을 매우 좁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한다. 이는 특히 끊일 듯 끊이지 않는 문장에서 알 수 있는데, 긴 호흡으로 문장을 채워나가며 눈앞에서 상황이 펼쳐지는 듯한 이미지를 그려내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파과」는 현대의 작품 중에서도 의미 있으며, 더 많은 독자들이 접했으면 좋겠는 작품이다.




영화 <파과>를 기다리며

영화 <파과> 공식 포스터


영화 <파과>는 2025년 2월 열리는 베를린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되었다.

영제는 <The old woman with the knife>, 직역하면 '칼을 든 노인 여성'이다. 예상컨대 흠이 난 과일을 뜻하는 원제 '파과'와 그에 얽힌 메타포를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다소 직접적이더라도 미스터리함을 강조하는 제목을 택한 것 같다.



위 링크에서 관련 정보를 확인해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2025년 5월 1일에 개봉했고, 나 역시 관람을 앞두고 있다. 원작과 또 다른 매력으로 풀어나갔을 영화 <파과>가 정말 기대된다. 영화를 보고 원작에도 관심이 생긴 모든 이들에게 해석에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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