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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e Mar 12. 2023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 속 ‘우아’진과 ‘박복’자

사랑의 첫 단계는 모방이다


영화, 드라마, 웹툰을 막론하고 모든 콘텐츠에서 중요한 것은 1,2화에서 시선을 끄는 것이다. 쉽게 말해 유튜브 썸네일처럼 강력한 '어그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의 콘텐츠 서사 구조는 '결-기-승-전-결'이 유행이다. 결말 부분을 초반 1,2화에 배치해 흥미를 끌고,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 역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결말, 가장 강력한 어그로는 뭘까? 바로 사람이 죽는 것이다.


특히 로맨스릴러(로맨스+스릴러)와 같은 복합장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한국 드라마 특성 상, 누군가 죽고 다치는 것으로 미스터리의 시작을 알린다. 예를 들어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미지의 인물이 사망한 듯한 연출을 하거나 (KBS <동백꽃 필 무렵>) /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연출을 한다. (tvN <일타스캔들>)


오늘 소개할 작품, JTBC <품위있는 그녀> 역시 비슷한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질질 끌지 않고 화끈하게 첫날부터 주인공 '박지영'이 죽었음을 공표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박지영, 아니 박복자가 대성펄프의 안家로 들어가기 전으로 돌아가 시작하게 된다.



<품위있는 그녀> 메인 포스터




품위있는 막장


막장드라마는 말그대로 '막장'인 소재를 쓰는 드라마로, 자극적인 연출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이야기 완성도 면에서 평가 절하 당하기 마련이다. '이 드라마, 막장이네.' 하는 소리들이 긍정적으로 쓰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특히 K-막장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아침드라마를 보면, 막장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접두사 '개'를 붙인 '개막장'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우리는 살인, 불륜, 학대 등 나쁜 짓이라곤 도무지 한 개에서 멈추지 않는 인물들이 나오는 '개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과연 웰메이드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왼) 왔다! 장보리 / (오) 품위있는 그녀


나는 이런 드라마를 딱 두개 봤는데, 바로 MBC <왔다! 장보리>와 오늘 소개할 <품위있는 그녀>다.

<왔다! 장보리>는 희대의 악녀 캐릭터로 불리는 '연민정'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엄청난 사랑과 질타를 받았다. 물론 출생의 비밀, 오직 여자에게만 쏠리는 불륜의 책임, 모성애 같은 소재를 생각하면 여성인권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작품이다. 하지만 폭발적인 인기의 막장드라마 타이틀에 이끌려 52화 정주행을 해본 사람으로서 말해보건데, 생각보다 스토리가 짜임새 있고 복선 회수가 굉장히 잘 돼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 작가가 <아내의 유혹>을 집필한 김순옥 작가임을 감안하면 납득이 간다.)


그렇다면 나는 왜 간병인이 재벌가를 차지하고, 완벽한 여자를 놔두고 불륜을 하고, 상류층 사람들의 이면을 다룬 막장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를 웰메이드라 생각하게 됐을까. 그 이유는 여성 서사로도, 스릴러로도 완벽히 잘 짜여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품위있는 그녀>의 두 주인공, 아진과 복자의 관계성을 위주로 캐해를 해보는 목적이므로 그에 맞춰 간단히 타임라인을 정리해보았다.

아진과 복자를 중심으로 한 <품위있는 그녀>의 타임라인




사랑의 첫 단계는 모방이다


세상 대부분의 이야기는 인간의 절대감정이자, '인간성'이란 걸 구분짓는 기준으로 사랑을 내세우곤 한다. 혹은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거나, 사랑과 동경을 구분하는 시도를 통해 복잡한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나는 사랑의 정의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인간의 행동양식이 사랑의 증거로는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우정은 가장 높은 단계의 사랑이라고 했나. 나는 친구따라 강남을 수백번도 더 가봤다. 칼국수를 좋아하는 친구랑 몇번 식사를 함께했더니 칼국수가 좋아졌고, 무채색을 좋아하는 친구랑 지냈더니 무지개색이던 옷장이 무채색으로 채워졌다. 친구가 하는 건 괜히 다 예뻐보이고, 왠지 다 맞춰주고 싶었다. 그 사람을 닮아가는 건 내 나름의 사랑 방식이구나 느꼈다.


호텔 직원 시절 박복자


이 드라마의 주인공, 박복자(김선아) 역시 우아진(김희선)을 향한 모방을 시작한다. 호텔방에서 사모님과 직원으로 처음 대면한 순간, 복자는 아진을 향한 욕망이 피어오른다. 복자의 마음은 동경일까, 질투일까, 혹은 사랑일까? 동경과 질투와 사랑은 한 끗 차이다. 닮고 싶으면 동경이고 끌어내리고 싶으면 질투고 함께 서 있고 싶으면 사랑이다.


아진과 복자의 관계성은 동경에서 질투로, 그리고 질투에서 사랑으로 변화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이성애자 관점의 섹슈얼적 의미가 아니다.)



첫째, 동경


복자는 처음 아진을 보고 '상류층 사모님'의 기품에 대해 생각한다. 호텔 직원에게 시킨 심부름 하나로 지나칠 수 있음에도 감사카드와 케이크를 남긴 아진을, 복자는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복자는 아진이 상류층 여성으로서 가진 품위에 욕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름처럼 '박복'한 삶을 사는 박복자와 달리, '우아'한 기품이 묻어나는 우아진으로의 신분 상승을 말이다.


그래서 복자는 아진이 둘째 며느리로 있는 대성펄프로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복자의 목표는 확고하다. 자신은 누려본 적 없는 부잣집 사모님들의 삶은 어떤 건지, 한번 살아보는 것. 그래서 대성펄프 안회장에게 계획적으로 접근, 이후 입주 간병인으로 들어가게 된다.


안회장과 박복자


안 회장은 그저 신분 상승을 위한 도구이자 한 가지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복자는 회장을 유혹한 이후 얻는 콩고물에 집중한다. 결국 복자는 안 회장의 새 부인이 되는 것에 성공하고, 대성펄프의 안주인으로서 아진의 시어머니가 된다.


(왼) 바람 사실을 알게 된 아진 / (오) 재석과 성희


한편 아진은 복자가 봤던 것처럼 '완벽한 상류층 여성'의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말 잘 듣는 남편 재석(정상훈)과 똑똑한 딸 지후(이채미)와 걱정할 것 없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던 그. 하지만 재석이 지후의 미술선생님 성희(이태임)과 바람을 피며 모든 것이 깨지고 만다. 아진의 가정, 믿음, 자존심까지 모두 박살나지만 재석은 불륜을 멈추지 못한다.


이때 아진-재석-성희의 불륜 문제에서 시선을 조금만 돌려 복자-아진의 관계성을 위주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재석의 바람 사실을 알게 된 아진은 성희의 집 앞으로 당장 찾아간다. 하지만 자신이 공고히 지켜온 품격과 사회적 지위 때문에 성희의 머리채조차 쉽게 잡을 수 없던 아진에게 복자는 말한다.

"그냥 내 손 더럽힐게."


성희를 조지는 복자


언뜻 보면 아진을 위하는 것이 맞다. 다만 그 내부에는 자신은 이제 공식적으로 아진의 일에 신경 쓸 수 있는 집안사람이자, 아진을 괴롭힌 작자에게 사적 복수를 행해줄 수 있는 유일한 자라는 걸 어필하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있다. 이는 곧 '내 사람'을 지킴으로써 아진과 한층 가까운 사이가 되고자 하는 복자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복자는 단순히 머리채 따위는 쉽게 잡을 수 있는 억센 여성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적으로 아진을 '내 사람'의 범주에 넣은 야망있는 여성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쯤에서 우리의 하유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되짚어 보자.

SBS <내 남자의 여자>


"교~양? 이게 내 교양이다."

동생의 불륜 상대의 머리채를 잡는 하유미 선생님의 명언이다.

그렇다. 이게 복자의 교양이고 품위다. 아진의 손을 더럽히는 것보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 그로 인해 지킬 것을 지키고 취할 것을 취하는 것.



둘째, 질투


안 회장의 신임을 얻어 대성펄프의 부회장 자리까지 오른 복자. 복자는 자신이 원했던 상류층 여성으로 바뀌어간다. 촌스러운 옷을 입고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그 이름도 박복한 '박복자'에서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고 사모님 소리를 듣는 '박지영'으로 가는 과정은 감회가 새롭다. 안 회장에게 가방 하나를 받고 엉엉 울던 복자는 이제 더 이상 울지 않는다. 강한 것만이 최고라는 것을 알아버렸기에.


하지만 지영의 욕심은 점점 더 커지고, 결국 안 회장에게 증여받은 대성펄프의 주식을 사모펀드에 매각한 후 잠적해버린다. 그러나 아진처럼, 정확히는 아진보다 높은 지위(집에서는 시어머니로, 회사에서는 부회장으로)를 가지게 됐음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이 동경했던 품위는 '상류층 여성'이 지닌 것이 아니라 '우아진'이라는 사람이 지닌 특성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복자의 혼잣말 장면을 봐보자.

https://youtu.be/Zw5BVOaClBU


저 멀리 창문 밖에서 복자는 재석과의 이혼 후 의류 사업을 준비 중인 아진을 바라본다. 그토록 원하던 막대한 재산을 가진 자신은 모든 걸 가져도 비참한 기분인데, 이혼 후에도 밝고 당당하게 꿈을 이뤄가는 아진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왜 저 여자는 다 잃었는데도 하나도 꿇리지가 않냐... 왜 난 다 가졌는데도, 하나도 당당하지가 않아!"


혼잣말처럼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은 뜻밖에도 상황을 수습하고자 자신을 찾아온 아진의 입을 통해 들려온다.

"진짜 당신 것이 아니니까."

아진은 가짜로 얻은 것들은 가짜로 대응해야 한다며, 복자의 주식은 안 회장이 치매 증상이 있을 때 증여받은 것이라는 가짜 증거를 가지고 복자를 협박한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안 회장의 간병인 자리로 되돌아 오라고 설득한다. 결국 복자는 박지영이라는 이름에서 내려와 간병인 박복자로 돌아온다.



셋째, 사랑


복자는 간병인으로 돌아오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건다. 바로 아진처럼 되고 싶다는 것. 아진처럼 입고, 생각하고, 동등한 위치에 서서 자신이 원하던 사람 그 자체가 되는 것. 아진은 결국 복자의 조건을 수락한다.


같은 옷을 입은 아진과 복자


복자는 그 의미로 아진이 자신과의 첫 만남 때 입고 있던 흰 정장을 똑같이 제작해달라고 한다. 자신이 처음 반했던 그 모습 그대로를 재현하고 싶다는 복자의 진짜 욕망이 다시금 드러나는 지점이다. 둘은 끝내 같은 옷을 입었지만, 그것은 복자에게는 수의가 된다.



복자가 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대성 家로 돌아온 날 새벽, 복자는 누군가에 의해 머리를 맞고 살해당한다.





누구나 범인이 될 수 있다


이 드라마가 단순히 상류층의 삶과 불륜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면 이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비슷한 막장드라마로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그런 드라마'로 끝나지 않게 하는 지점은 바로 스릴러다.


이 작품의 큰 구조를 보면 1. 복자의 죽음으로 시작 / 2. 아진의 이혼과 상류층의 삶 / 3. 복자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 로 복자의 죽음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인 수미상관 형태다. 특히 후반부 복자를 죽인 범인에 초점을 맞춘 전개는 미스터리적 특성을 지니며, 범인이 누구일지 유추하는 추리극의 형태를 띄기도 한다. 또한 모두가 범인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복자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배신당한 안 회장, 복자에게 무시당한 첫째 재구와 아내 주미, 아들 운규, 복자가 대성펄프를 넘긴 탓에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둘째 재희와 셋째 재석까지. 복자를 죽일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가득하다.


복자를 죽인 범인은 첫째 재구의 소행으로 마무리되는 듯하나, 마지막 회에 가서야 이 반전은 드러난다. 범인은 재구가 아니라 재구의 아들, 운규였다는 점이다.


(왼쪽부터) 운규와 재구


운규는 망나니짓 때문에 할아버지인 안 회장의 눈 밖에 난 재구와 그로 인해 눈치를 보는 주미 사이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고, 결국 자신의 가정을 박살낸 원인을 복자라고 생각해 죽인다. 운규는 자신은 괴물을 죽인 것뿐이라 말하고, 재구는 아들의 살인죄를 뒤집어 쓴다.


결국 복자는 새로운 사람로 다시 시작하고자 했으나 자신이 한 과오들에 발목이 붙잡혀 죽음이 이르게 된 것이다. 끝내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이야기이지만, 그 시작이 자꾸 마음에 걸려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복자에게 조금이라도 친절했다면 어땠을까? 이야기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친절하지 않았고, 그래서 복자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친절했던 아진을 쫓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냈다. 때문에 <품위있는 그녀> 속 우아진과 박복자의 관계성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p.s 이 드라마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건 대성펄프를 공중분해한 박복자가 아니라 우아진을 두고 바람피우는 남편이라는 설정이다. 이게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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