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지배 사회》

과학의 껍질을 쓴 위험한 사회적 논증

by 이원규
《유전자 지배 사회》, 최정균, 2024, 동아시아.

유전학자며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인 최정균 교수의 책으로, 저자 소개에 딸린 책 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된 지 5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유전자들의 지배가 그것의 조종을 받는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사회적 산물과 문화, 정치와 경제를 비롯한 여러 활동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폭넓은 소개는 드물었다. 저자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네이처》, 《사이언스》, 《셀》 등 유수 학술지들에 실린 최신 연구들을 바탕으로 한층 더 깊이 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나아가,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들을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데서 발생하는 갖가지 부조리와 비극을 고발하며, 그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이는 그저 홍보용 문구에 그치지 않고, 이 책의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관점 하나로 사회, 문화, 정치, 경제를 모두 설명하려는 시도가 이 책의 의의라면, 이기적 유전자들을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데서 발생하는 갖가지 부조리와 비극을 고발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독자로 하여금 이기적 유전자를 온갖 부조리와 비극의 원천으로만 읽도록 한다는 점이 책의 한계입니다. 과학 학술 논문을 대표로 들어 사회·문화·정치·경제를 서술하겠다는 과학 위주의 통섭은 자칫 사회·경제·정치·문화적 문제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학자가 제시한 답에 사회는 순종해야 한다는 과학만능주의로 기울 수 있습니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책의 시작

저자 소개

들어가며

1장 가정: 사랑이라는 자기 기만

2장 사회: 혐오로 가장한 두려움

3장 경제: 자본주의 세상의 번식 경쟁

4장 정치: 자연스러운 보수, 부자연스러운 진보

5장 의학: 아프고 늙고 죽어야만 하는 이유

6장 종교: 인간은 태어나지 않는다

나가며

판권


1장과 2장이 보여주듯, 이 글은 이기적 유전자가 나타내는 사회적 병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3-6장 제목은 1-2장과는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1장과 2장과 같은 구조입니다.


1장에서는 부부 관계를 비관적으로 서술하는데, 본문보다 결론에서 더 자극적인 문구를 씁니다. 본문에서는 “진화의 세계에서 오직 생물학적으로 건강하고 다양한 후손을 남길 수만 있다면 부부의 삶과 행복이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라고 서술하고, 결론에서는 “호르몬의 불장난과 유전학적 차이의 매력에 이끌려 맺어지는 이 관계의 대부분은 결국 불행한 결혼 생활로 종결된다”라고 정리합니다.


글쓴이는 이기적 유전자가 인간의 여러 불행과 부조리를 낳는다는 논지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같은 생물학적 본능이 관계를 통해 완화되거나 오히려 긍정적 가치(안정, 돌봄, 상호성)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분석 범위에서 거의 제외합니다. 애착 이론이나 관계 기술처럼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결혼’이 가능하다는 심리학적·사회과학적 논의가 이 장의 논증에서는 검토되지 않기에, 결혼은 대부분 불행하다는 결론이 사실상 유일한 귀결처럼 제시됩니다. 더구나 이 장은 결혼과 양육의 병폐를 이기적 유전자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에, 결론은 하나의 해석을 넘어 마치 논리적 필연처럼 보이게 됩니다.


2장에서는 혐오의 생물학적 근원을 설명하면서, 이 혐오가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유지되지만 그 대상을 인간으로 확장하는 비인간화가 나타난다는 문제를 짚어냅니다. 그 과정에서 인종차별을 부정하는데, 6장에서 더 명확해지지만, 이 책은 반인종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인종은 생물학적으로 실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는 현대 유전학의 연구 경향과는 어긋나는 면이 있습니다. 최근 유전학은 인종을 분석 단위로 정립하기는커녕, 혈통·집단·선조(ancestry)를 더 세분화하고, 유전적 변이가 연속적으로 분포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인종’이라는 범주가 자연적 실체라기보다 인위적이고 임의적인 분류임을 오히려 더 분명히 해 왔습니다.


글쓴이가 지적하듯, 유전학 연구가 과도하게 유럽인 계통 위주로 수행되어 온 문제는 분명히 존재하며, 이를 다양성의 관점에서 교정해야 할 의료적 필요성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해법은 인종 범주를 재도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유전적 변이를 더 정교하게 포착하고, 집단 간 이질성을 확률적으로 다루는 연구 설계와 의료 적용을 확장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반인종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인종의 생물학적 실재를 사실상 확정해 버리는 이 책의 전략은, 현대 유전학이 어렵게 확보해 온 개념적 성과, 즉 인종 개념의 한계와 위험성을 과학적으로 구분해 온 작업과 어긋나는 선택으로 보입니다.


또한 혐오를 측정·설명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암묵적 연합 검사(IAT)를 신뢰하는 듯한 논의가 보이지만, 최근 타당도·신뢰도 논쟁과 재현성 문제, 그리고 대안적 측정 틀에 대한 정리와 한계 표시는 충분히 제시되지 않습니다. 생물학적 기제 설명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측정 도구가 무엇을 어디까지 포착하는지(예: 예측력의 크기, 상황 의존성, 개인 수준 해석의 위험)를 함께 제시해야 하는데, 최신 연구를 다수 인용한다는 기조와는 반대로 이 점이 약합니다.


3장은 경제학에서 주로 가정하는 합리적 인간 가정이 비현실적이고 인간은 번식에서 성공하고자 과시 등을 활용해 이성에게 신호를 보내는 인간임을 논증합니다. 이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지대 착취 욕구 역시 신호 이론의 일환으로 설명하면서, 이 지대 착취가 경제를 지배하고 있으며 여러 사회 병폐의 원인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에서 신고전학파와 한계효용 이론에 따르면 지대 추구가 정당화된다면서 주류 경제학 비판에 들어가고 주류 경제학 대신 이전의 정치경제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폅니다.


현대 주류 경제학은 신고전파의 가정을 기본으로 받아들이고 수학적 이론과 모형을 많이 사용하면서도 다양한 이론적 틀을 만들어내 신고전파의 지나치게 간단하고 현실과 어긋나는 예측을 상당 부분 수정합니다. 지대 착취 역시 주류 경제학에서는 비판을 받고, 책에서 비판하는 거대 기술 기업의 지대 추구 역시 마찬가지로 분석이 됩니다. 책에서 주류 경제학이 유전자적 본능을 외면하고 합리적 인간('이콘')에만 집착한다는 것은 주류 경제학을 신고전파로만 단순화한 것입니다. 이런 점을 외면하고 경제학이 자연과학을 참칭한다는 듯한 비난은 방향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현상을 살펴본다는 책의 범위도 넘어섭니다.


4장은 보수와 진보를 유전자적, 자연적으로 정의하려는 진화심리학적 연구를 인용하는데, 그 과정에서 실제로 각국에서 보수와 진보가 어떤 점에서 공통적 경향을 보이는지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었는지는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등의 책에서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별다른 설명 없이 미국의 보수와 진보 경향이 세계 공통인 것처럼 전제합니다.


보수적 성향이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진화적 본능에서 나왔다는 결론 역시 책에서는 너무 간단하게 제시돼, 진화심리학의 오래된 난제인 사후 정당화의 소지가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보수의 이념은 자유시장 경제와 맥을 같이한다”라는 말은 어떠한 인용도 없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반시장 보수와 친시장 보수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정치학·진화심리학에서 논쟁하는 현실은 충분히 다뤄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보수는 확증 편향에 빠져 있다는 연구 결과는 인용하면서 진보는 오인 편향에 빠져 있다는 연구는 누락되어 있어 정치적 편향성이 보입니다. 이 편향성은 미국에서 민주당 성향 주와 공화당 성향 주의 사망률을 인용해서 이념이 생존을 좌우한다고 주장한다는 데에서 더 크게 나타납니다. 이는 맥락이나 교란 변수나 인과 관계 분석 등 없이 상관 관계만으로 내리기에는 너무 위험한 주장으로, 특정 이념을 공공연히 해로운 것으로 공격하는 듯한 윤리적·정치적 함의를 동반합니다.


5장에서는 “열성유전자에 대해서는 공중 보건과 같은 의료적 구조 체계가 필요하며, 경제력을 비롯한 사회적 특권을 이용해 우성유전자를 획득하고 소유하려는 행위는 규제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성유전자와 열성유전자라는 용어가 오해받는 그대로 잘못 쓰이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그토록 우려하고 막으려고 한 현상입니다. 의도는 인류의 복지를 위한 것이며 유전체 정보가 인류의 공동 유산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연장선으로 그 옛날 우생학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우생학을 엎기 위해 우생학의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방향만 뒤집는다는 발상은 과학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인종 문제도 그렇지만, 과학은 어떤 개념이 사회적으로 오용되는 것보다도 과학적으로 제대로 정의되기 어려울 때 용어를 해체하고 다른 용어로 대체하거나 재정의합니다. 우성유전자와 열성유전자도 사회적인 우열로 오해되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현성(나타남)과 잠성(숨음)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글쓴이는 사회적인 불평등을 없애야 한다는 이유로 과학적으로 잘못된 개념을 그대로 유지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종 문제에서는 구식 개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른 것이며 고치려는 쪽이 잘못되었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이는 과학적 추세와도 맞지 않습니다.


5장에서는 또 자연이야말로 인류를 죽이는 근원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위협하는 수많은 요인들은 자연에 내재된 것이며, 심지어 죽음, 암, 치매조차도 유성 생식의 부작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연적 발병 요인과 인류 문명의 영향이 상호 작용하며 질병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는 단순화됩니다. “농업혁명과 기술 발전을 탓할 수는 없다”라면서 궁극적 원인을 자연환경에 돌립니다. 이는 유전 대 양육의 대결에서 유전적 소인이 환경(양육·제도·노출)에 의해 강화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는 현대적 설명 방식을 “아무튼 유전자 때문이야”라는 단선적 인과로 단순화하는 오해와도 상통합니다.


5장의 더 치명적인 문제는 유전자변형작물(GMO)에 대한 반발을 다루는 태도입니다. GMO 사용에서는 어떠한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았고, 위험하다는 주장에도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연구 결과만 인용하고 GMO가 불러올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황금쌀을 쓰면 비타민 A가 결핍된 사람들의 목숨을 건지고 눈을 건질 수 있는데 안 쓰게 한다면서 사회적 구조는 전혀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금도 식량 총량은 전 인류를 다 먹여살리고도 남지만 이를 분배할 수 있는 구조가 없어서 사람이 굶어 죽습니다. 기술 도입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글쓴이는 막스 플랑크의 주장을 인용합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거나 감화시키지 않는다. 그보다는 반대자들이 다 죽고 나서 새로운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때 비로소 승리한다.” 이 맥락에서 플랑크의 격언을 인용하는 것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는데, 하나는 기술 반대가 곧 생명 경시라는 도덕적 판단을 내린 경우고, 다른 하나는 그런 함의 없이 그저 권위 있는 말로 논쟁을 종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과학·사회적 쟁점을 설득과 검증해야 할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 자체를 부정적으로 낙인 찍는 결과를 낳습니다.


6장은 종교를 다루지만, 여러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만을 다룹니다. 이 책이 리처드 도킨스를 의식한 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기독교만을 논하는 것은 옹호할 여지가 있습니다. 도킨스의 작업이 다른 종교를 폭넓게 비교하기보다는, 기독교 문화권 내에서 종교적 권위를 해체하는 효과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알의 신전에서 난잡한 성행위와 유아 인신공양이 벌어졌다는 서술은 바알 신앙을 다소 피상적으로 이해한 결과로 보입니다. 유아 인신공양은 일반적으로 몰렉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 몰렉은 아무리 넓게 보더라도 바알 신앙권 내부의 일부에 해당할 뿐 바알 신앙 일반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바알의 신전에서 난잡한 성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주장 역시 성경 텍스트 내부에서조차 확정적으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혐오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장에서 이러한 논쟁적인 종교사적 서술을 사실인 듯 전제하는 것은, 오히려 타 종교 전통을 단선적으로 악마화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그러면서 전통 기독교는 잘못된 기독교며, 진짜 예수가 가르친 기독교를 사해동포주의적 사랑의 종교며 혐오의 반대편의 선 종교라고 보는데, 이는 일견 진보주의적 기독교의 한 극단적인 부류인 무신론적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서 검토한 “자연은 우리의 모범이 아니라 반면교사다. 다시 한번 인종주의를 예로 들자면, 자연에는 인종 간의 차이와 그로 인한 차별이 존재하므로 오히려 우리는 인종에 따른 차별을 행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문장의 자연=악, 문명=도덕=선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확장해, 자연=보수=보수 기독교=악, 문명=진보=무신론적 기독교=예수=트랜스휴머니즘=선이라는 사고로 나아갑니다.


책을 결론 짓는 “나가며”에서는 “물론 그것에 이르는 길은 평탄하지 않으며 많은 경우 정치적 투쟁을 필요로 하겠지만, 먼저 깨친 선구자들의 투쟁은 억압된 자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인식을 통째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라고 하며 그런 특정한 정치·경제·사회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이 책을 문제점 위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그만큼 책이 도발적인 과업을 해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작업이 험난하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단 하나로 모든 인간의 현상을 설명하겠다고 하면, 그만큼 모든 인간의 현상을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책은 그 대신 특정한 정치·경제·사회적 사상을 정당화하는 데 이기적 유전자를 사용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글쓴이는 이기적 유전자의 여러 활동이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영역을 탐구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데 적극적으로 쓰이지 않는 것을 집필 동기로 서술합니다. 그 결과물인 이 책은, 과학적 설명을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새로운 철학적 통찰이 아니라 특정한 사상을 편파적으로 정당화할 위험이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책은 표지에서 마이클 샌델이 쓴 《이기적 유전자》라고 스스로 홍보합니다. 능력주의 비판, 혐오 비판, 가족 편향에서 벗어난 공동체성 회복 등의 결론은 샌델과 비슷합니다. 최정균은 분명히 이 사회를 더 좋게 바꾸고자 하는 목적을 책에서 숨김 없이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그 논증의 방식은 다릅니다. 샌델은 민주적 논의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최정균은 과학적 설명을 우선으로 삼아 사회·정치적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서 자연과 이에 친화적인 보수는 부정적으로 서술하고, 과학기술에 회의적인 태도는 토의나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장애물처럼 취급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민주주의적 도덕 논쟁보다는 과학을 권위의 원천으로 두는 과학기술 관료주의에 더 가깝습니다. 샌델의 문제 의식을 과학적으로 적용한 책이라기보다는, 샌델과는 다른 계보에 속하는 과학 중심의 사회 비평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과학자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등 민주주의와 과학기술사회학을 다루는 책에서는 선의를 앞세운 엘리트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위험 요소임을 강조합니다. 과학자·기술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서평을 쓸 때 영향을 받은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 내 사랑은 이렇게 힘들까》, 다이앤 풀 헬러, 2024, 멀리깊이

애착 이론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책으로, 부부 관계가 대부분 불행으로 끝난다는 말에 혹시 좌절하셨다면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트, 2014, 웅진지식하우스

보수를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단정하는 듯한 서술에 왜 이론적 긴장이 발생하는지를 인식하게 해 준 책입니다.


《정치 성향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존 R. 히빙·Kevin B. Smith·존 R. 알포드, 2025, 오픈도어북스

보수와 진보의 성향이 생물학적·심리적 요인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다루되, 그 설명에서 정치적 규범을 도출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책입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2018, 어크로스

민주주의 문화의 중요성과 현대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 문화가 무너지는 현상을 설명한 책으로, 상대방을 대화 불가능, 타협 불가능한, 타도해야 할 적으로 보는 것이 해롭다고 강조합니다.


《과학자에게 이의를 제기합니다》, 도다야마 가즈히사, 2019, 플루토

일반인에게 필요한 과학적 리터러시를 설명하고, 군에 문민통제가 필요한 것처럼 과학기술에도 문민통제가 필요하다는 도발적인 과학기술사회학적 명제를 던져 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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