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을 끊었다고요?”

같은 말이 정반대를 뜻하는 동음반의어

by 이원규
Le_buste_de_Janus.jpg 그림 1 바티칸의 야누스 두상.

1월 1일은 한 해의 시작임과 함께, 지난 한 해를 닫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1월의 영어 명칭 재뉴어리(January)는 이런 시작과 끝이라는 양면성을 지니는 로마 신 야누스(Janus)에서 이름을 따 왔습니다. 한 얼굴로는 과거를, 다른 얼굴로는 미래를 보는 셈입니다.

말에도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 낱말이 동시에 반대 개념을 뜻하는 동음반의어입니다. 영어로는 auto-antonym, 또는 contronym이라 하는데, 위에서 말한 야누스에서 따서 야누스의 말(Janus word)이라고도 합니다. 이 동음반의어는 언어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모순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동음반의어는 언어의 기묘한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인 과정을 거쳐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원으로는 전혀 관계없는 말이 우연히 발음이 같거나 같아져서 동음반의어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말에서는 연이어 우승한다는 뜻의 연패(連覇)와 연이어 진다는 뜻의 연패(連敗)를 들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서로 다른 두 낱말이 음운 변화를 거쳐, 쪼개다와 달라붙다를 둘 다 뜻하는 cleave로 변한 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어원에서 동음반의어의 반대되는 두 뜻이 모두 도출되기도 합니다. 첫째로는 동일한 대상에 평가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경우입니다. 팔방미인은 사전에서 “여러 방면에 능통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과 “한 가지 일에 정통하지 못하고 온갖 일에 조금씩 손대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는 반대되는 뜻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둘째는 어떤 낱말이 관용적으로 쓰이다가 그 일부가 원래 의미와 반대로 재분석되는 경우입니다. 주책은 주책없다는 말이 나타내듯 일정하게 자리 잡힌 판단력이나 주장을 뜻하지만, “주책없다”라는 표현이 굳어지면서 주책만으로도 주책없음을 뜻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로는 같은 낱말과 관련되면서 서로 모순되는 두 행위가 파생되는 것입니다. 설사약은 “설사를 치료한다“라는 상위 목적 안에서 설사를 멈추게 하는 지사제와 설사를 일으키는 하제 두 가지가 동시에 나왔습니다. 영어의 dust는 먼지를 떨어내는 것도 되고, 먼지 같은 가루를 뿌리는 것도 됩니다.


또 다른 사례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그 상태를 수습하는 행위까지 가리키게 되면, 상태와 조치가 한 낱말에 공존하게 됩니다. 한자 어지러울 난(亂)은 ‘어지럽다’라는 뜻과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다’라는 뜻이 같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비유의 일종인 환유에서 동음반의어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조금 복잡하기 때문에 찬찬히 설명하겠습니다.


환유법은 어떤 대상을 그와 연관이 있는 다른 대상으로 지시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책갈피는 원래는 책장과 책장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비상금을 책갈피에 끼웠다는 말에 이 용법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서 책을 읽는 자리를 표시하고자 책갈피에 끼우는 것도 책갈피라고 부릅니다.


은유와 환유를 모두 거친 동음반의어로는 끊다를 들 수 있습니다. 끊다는 원래 “실, 줄, 끈 따위의 이어진 것을 잘라 따로 떨어지게 하다.”라는 물리적인 의미가 있고, 이를 은유해서 “관계를 이어지지 않게 하다.”로 확장됩니다.

한편 끊다에는 “옷감이나 표 따위를 사다.”라는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표나 회원권은 계약 관계를 입증하는 증표이므로, 이를 끊는 행위는 곧 계약을 맺는다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때 표라는 결과물이 계약이라는 행위를 대신 지시하는 환유적 의미 확장이 일어납니다.

헬스장을끊다.png 그림 2 끊다가 동음반의어가 되는 은유·환유 과정.

예를 들어 “헬스장 회원권을 끊는다.”라는 표현은 헬스장과 계약을 체결한 것을 뜻하며, 회원권이 생략되어 “헬스장을 끊는다.”라고만 해도 같은 뜻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헬스장과 관계를 이어지지 않게 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어, 같은 낱말이 관계의 성립과 종결이라는 상반되는 사건을 모두 가리키게 됩니다. 이로써 끊다는 은유와 환유, 그리고 생략을 거쳐 동음반의어가 될 수 있습니다.


원 뜻에서 벗어났고 아직 표준화되지는 않은 말인 전문가의 조언이나 의견을 뜻하는 자문과, 포경수술을 받은 상태라는 뜻으로 쓰이는 포경도 환유를 거친 동음반의어로 볼 수 있습니다.


자문은 한자로 물을 자(諮)에 물을 문(問)을 쓰며, 원 의미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요즘 많이 쓰이는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다”나 “전문가의 자문을 받다”라는 말을 자문의 원 뜻을 살려서 쓰면 “전문가에게 자문을 하다”나 “전문가가 자문에 응하다”와 같이 됩니다. 예로, 대한민국 헌법 91조 1항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둔다고 규정합니다.

자문받습니다.png 그림 3 자문이 동음반의어가 되는 환유 과정.

자문에서 자문기관이라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어떤 조직체에서 집행 기관의 자문에 대하여 의견을 제공하는 일을 맡아보는 기관.”으로 풀이합니다. 곧 자문에 응하는 것이 임무인 기관이 자문기관입니다. 그런데 자문기관이라는 복합어가 자문으로 축약되면서, 자문기관이 활동한 결과물인 조언이나 의견으로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문기관의 어원 의식은 옅어지는 현상도 같이 발생했습니다. 그 때문에 자문의 원래 뜻 대신 자문기관이 행하는 일이라는 환유가 쉽게 정착한 것이지요. 이를 거쳐, 자문은 질문과 응답을 같이 뜻할 수 있는 동음반의어가 되었습니다.


비슷한 과정은 포경수술한 상태를 가리키는 포경이라는 말에서도 나타납니다. 본디 포경은 포피가 귀두를 덮은 상태를 가리키고, 이 포경을 교정해 귀두를 드러내는 수술이 포경수술입니다. 그런데 포경수술이란 말이 널리 쓰이고 어원 의식이 옅어지면서, 포경은 포경수술, 더 나아가 포경수술을 한 상태로 환유됩니다. 이에서 포피가 귀두를 덮은 상태와 포피를 잘라내 귀두를 드러낸 상태라는 의미가 모두 포경에 들어왔습니다.


여러 다양한 동음반의어의 사례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동음반의어는 언어 확장에서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며, 축약·환유·재분석을 거치면서 의미 변화의 중간 다리가 사라지고 반대 의미가 한 단어에 겹치게 됩니다. 1월 1일이 한 해의 시작이자 지난 해의 종결이듯, 한 낱말이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상반되는 면을 모두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런 동음반의어는 언어가 얼마나 자유롭게 의미가 확장되고 파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참고 자료

표준국어대사전

박재연: 〈일상 언어의 은유와 환유〉, 새국어생활, 2019, 29, 4, 69-88, https://www.korean.go.kr/nkview/nklife/2019_4/29_0404.pdf

김현정: [우리말 바루기] ‘헬스장을 끊다’는 무슨 뜻?, 중앙일보, 2019-10-14, 2026-01-01 확인,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602737

Contronym – Wikipedia, 2026-01-01 확인, https://en.wikipedia.org/wiki/Contronym

동음반의어 – 나무위키, 2026-01-01 확인, https://namu.wiki/w/%EB%8F%99%EC%9D%8C%EB%B0%98%EC%9D%98%EC%96%B4


그림 출처

그림 1: PassionHistorique, Le buste de Janus.jpg, 위키미디어 공용.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e_buste_de_Janus.jpg, CC-BY-SA 4.0.

그림 2, 3: 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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