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인 공감의 주체와 대상은 정해져 있는가?
미국의 언론인 케이틀린 유골릭 필립스가 쓴 《감정의 미래》는 공감과 기술을 주제로 하는 책으로, 미국의 2020년 무렵을 배경으로 합니다. 따라서 공감과 기술의 대상도 미국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책에서 나오는 여러 기술들은 2020년 기준의 것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구식이 되어갈 기술들입니다. 그러나 공감은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주제입니다. 공감의 주체는 누구며, 대상은 누구인지 설정하는 문제는 당시 기술이 공감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주는 방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도서 평론 사이트인 GoodReads에서 3.2/5로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리뷰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감정의 미래”라는 제목이 심리학·인문학적 통찰을 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책은 그와는 전혀 먼 기술 응용·상품화 저널리즘에 가깝거든요.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책이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보수주의자나 트럼프 지지자들은 잘못된 사람들로, 공감을 통해 옳은 방향으로 교정되어야 할 존재처럼 표현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책의 초반부에서는 불편부당한 공감을 주로 다룹니다. 경찰의 가혹행위와 해로운 남성성을 주로 다루는 유튜버와 그에 항의하는 시청자의 오프라인 대담, 공화당의 책략가와 진보 평론가의 방송 대담, 그리고 글쓴이 본인이 “흑인의 목숨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놓고 경찰관이 된 동창과 온라인에서 분쟁한 게시글. 이 모든 사건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 판별하기보다는, 둘이 서로 다른 견해를 지니고 공감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바라봅니다. 학생들은 트럼프 지지자와 멕시코 이민자, 경찰과 흑인 등에게 서로 공감한다면 어떻게 될지를 놓고 토의합니다.
그러나 기술 활용의 실례에서는 일방적인 공감의 사례가 많아집니다. 총기난사, 강도, 폭행, 성폭행, 성희롱, 인종차별 등의 주제에서 피해자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 피해자들 본인들이 설계한 기술들과 피해자들의 권익을 지키는 조치에 공감하기 위한 기술들이 다수 나옵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목소리만 나열되고, 가해 행위의 맥락이나 구조적 책임, 중립적인 평가는 제외됩니다. 이러한 피해자 중심주의와 더불어 자주 나오는 주제는 유색인종·이민자·소수성·수감자·낙태 여성 등 소수자들에게 공감하기 위한 기술들로, 이들은 미국 정치 환경에서 주로 진보주의자들이 공감하기 쉬운 대상들입니다.
그렇다고 보수주의자들에게 잘못했다고 적극적으로 논박하지도 않습니다. 보수 진영에서 자주 반대하는 대상들에게 공감할 것을 요구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실제 보수주의자를 설득한 사례도 낙태 반대 의원이 낙태 찬성으로 돌아선 것이 아니라, 낙태 반대 시위의 폭력성에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공감 공감이 실패하는 것을 반대자들의 도덕적 결함으로 서술하는 것을 피합니다.
책이 인공 임신 중절 문제에서 어느 한쪽을 정당화하지는 않으면서도 낙태 여성에게 공감하는 시선을 보내는 이유도 어쩌면 이 공감이라는 감정의 근본적인 한계일 수 있습니다. 공감과 동정은 비슷해 보이지만 공감은 다른 사람과 같은 처지에 서 보는 것, 동정은 다른 사람을 그대로 두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임부는 경험과 관점이 있는 존재이므로 공감의 대상이 되기 쉽고, 태아는 공감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고 동정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공감 기술을 중심으로 한 논의는 임부의 선택을 강조하는 주장과 더 쉽게 결합하는 한편, 태아의 생명을 중시하는 주장과는 연결되기 어려워지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도리어 공감이 실패하는 원인을 공감 기술과 그 사용에 주로 돌립니다. 예를 들어, 앨 고어가 제작한 〈멜팅 아이스〉는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어진 탓에 목적인 기후변화 인식 제고에 실패할 위험이 크다고 비판합니다. 마크 저커버그의 푸에르토리코 방문 중계는 제작진의 다양성이 부족해 백인 남성의 시각에만 머물렀다고 비판합니다. 이처럼 제작물의 연출·창작 과정에 문제를 돌리기도 하고, 공감을 위한 VR 기술이 아무리 생생해도 결국은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기술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합니다. 공감을 유발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영상이나 게임 등이 공감이 아니라 동정심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소수자가 아니라 소수자들 중의 영웅적 경험에만 공감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무리 공감한다 하더라도 이는 끝내 타자화에 머문다는 공감 자체를 회의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책이 보수주의자나 트럼프주의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부분은 적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부채를 지우는 효과는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공감하기 쉬운 의제들은 다루지 않습니다. 즉, 그들을 적극적으로 비난하지는 않되, 공론장에서 그들의 의견이 설 자리가 없게 소외합니다. 책의 초점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들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에게 공감이 정말 유효한지 낙관적·비관적 양쪽 시선에서 바라보도록 촉구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책이 낮은 평점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공감 기술의 응용과 산업화 사례들을 비슷한 주제끼리 묶어 나열하기에 그친다는 점입니다. 공감의 주체와 대상은 정해져 있지만, 왜 그렇게 정해져 있는지 파헤치지는 못합니다. 이러니 그저 몇몇 신기한 앱들을 소개하는 보도 자료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나마 공감 기술이 실현되는 사회적 맥락을 드러내는 대목으로는 체험 VR에서 표현되는 대상이 대부분 소외받는 사람들에 집중되어 있다는 지적입니다만, 이 역시 공감의 정치적 구성을 분석하기보다는 제작 주체가 실리콘밸리의 백인 남성 위주라는 점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로 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7장과 8장에서는 이 책의 기술적 의제가 2020년 당대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는 사례를 제공합니다. 7장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상담사 엘리는 인간처럼 소통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아니라서 내담자들이 더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처럼 경청하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인간과는 달리 내담자를 꾸짖거나 비난하거나 악의적인 소문을 낼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기에 그럴 것입니다.
8장에 등장하는 여러 인공지능들의 편견이나 차별 문제는 당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아마존에서는 인공지능으로 기술직을 채용하려 했으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차별을 그대로 학습해서 여성을 채용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응해 여성 차별을 억제하는 규칙을 집어넣으려다가 인공지능이 교묘하게 우회해서 차별을 학습할 것을 염려해 인공지능을 활용한 채용을 포기했습니다. 이는 대형 언어 모델(LLM)이 사회를 뒤흔들어 놓은 시대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인공지능 회사들은 자신들의 LLM에 학습 데이터에서 비롯하는 편향을 억제하도록 하는 정렬을 넣어 두었으나, 두 변수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는 데 능한 현재의 인공지능은 데이터에 있는 차별을 반영하는 숨은 변수를 어떻게든 찾아내려 합니다.
엘리는 공감 능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줄 뿐입니다. 아마존의 채용 인공지능은 인간이 차별의 피해자에게 공감하라는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공감하라고, 공감을 만들어 내라고 판단을 맡기지 않을 때에 비로소 기술은 인간의 공감 능력을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해야 할 판단을 인공지능에게 맡기면, 공감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는 기술을 통해 인간의 공감 능력을 키워내는 것뿐만 아니라 공감 자체를 유도하려는 노력들을 응원합니다. 그러나 기술이 공감을 돕는 것은 의식적인 유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합니다. 그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