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주의·반지성주의·크리스텐덤 비판과 진화론=과학주의 도식의 긴장
글쓴이 신무환은 반도체공학자면서 소속 교회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영역주권·일반은총을 소개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도 세속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을 대비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지니고 세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으로 영역주권을 제시합니다.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가 협력하고 기독교도가 세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수 있는 실마리로 일반은총을 제시하고, 기독교도의 삶에서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이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를 다루면서 책을 마칩니다.
책은 3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 “무너진 세상에서 정체성 바로 세우기”는 세속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을 대비하고, 2부 “삶의 자리에서 주권 되찾기”는 영역주권을, 3부 “넘치는 은총으로 세상에 들어가기”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을 다룹니다.
책이 주로 제시하는 세속적 세계관은 책의 용어로는 무신론적 인본주의입니다. 이를 학술 용어로 번역하면 세속적 인본주의, 특히 비초자연주의·자연주의적 변형이 주된 표적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공계 대중 담론에서 주로 나타나는 반기독교 논증이 형이상학적 자연주의·과학주의의 언어를 쓰는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실제로 책이 인용하는 2차 인본주의 선언문(1973년 발표)의 일부는 이러한 연동 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선언문은 “불멸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나 영원한 저주에 대한 두려움은 환상이며 해롭다”고 말한 뒤, “오히려 과학은 인류가 자연적 진화의 힘에서 출현한 존재라고 단언한다”라고 이어 갑니다. 이 문장은 초자연적 신앙에 대한 규범적 평가(‘해롭다’)와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서술을 분리하지 않은 채 결합함으로써, 과학의 권위를 세계관적 판단까지 확장하는 전형적인 과학주의적 수사로 읽힙니다. 다만 이것이 세속적 인본주의 전체의 대표성이라고 단정되기보다는, 글쓴이가 주로 대응하려는 특정한 형태의 세속 인본주의로 이해하는 편이 공정할 것입니다.
과학주의는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을 절대적인 가치로 보고 ‘유일하거나 최종적인’ 인식 기준으로 만드는 태도입니다. 환원주의는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에 여러 단계가 있다고 보고, 높은 단계의 설명(심리·사회·윤리)을 더 낮은 단계(신경·생물·물리)의 설명으로 원칙적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보는 주의인데, 방법론적(연구 전략) 환원주의와 형이상학적(실재론적) 환원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성이나 도덕성이 옥시토신 등 생물학적 기제와 관련된다는 가설을 탐구하는 것은 과학적 설명의 확장일 수 있으나, 그것이 곧바로 “도덕은 호르몬 작용일 뿐”이라는 결론(환원주의적 ‘그것뿐’ 주장)으로 넘어가거나, 더 나아가 “과학만이 의미와 가치를 규정한다”는 결론(과학주의)으로 이어지는 것은 별개의 철학적 도약입니다. 이 책이 문제 삼는 지점은 이러한 도약의 위험성으로 읽을 수 있지만, 엄밀하게는 기제 탐구(방법론적 환원)와 의미를 삭제하는 납작한 환원(형이상학적 환원)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특히 책은 인간 심리·윤리에 대한 생물학적 기제 설명(환원주의적 해석과 결합되기 쉬운 담론)을 ‘진화론’이라는 표지로 묶어 제시하는데, 이때 비판의 정확한 표적은 진화생물학의 핵심 이론 자체라기보다 강경 환원주의, 이에 동원되는 대중적 진화심리학 서술에 더 가깝습니다. 이 구분이 명료해질수록 책의 과학주의 비판은 더 설득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과학주의는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없는 대상을 인지적으로 부차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글쓴이 역시 이 점을 지적해, 신은 이성과 과학으로 탐구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입증할 수도 없지만 반증할 수도 없음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과학적이지 않은 대상인 신을 믿는다고 위축되거나 신앙을 부정해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다만 이런 변증은 과학으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 불가능함을 근거로 삼는 기독교 공격에서는 약점을 보일 수 있습니다.
책은 기독교 세계관으로 과학주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맞설 것을 주장합니다. 특히 세속적 인본주의에서 행복과 의미, 책임 등의 가치를 무신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에 맞섭니다. 이 문제를 회피하고 행복과 쾌락을 거부하는 금욕주의나, 반대로 개인의 행복과 번영을 기독교의 본질로 전도하는 번영신학을 모두 거부하고,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을 빌려 이 주제들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서 재정의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역주권론 부분에서 설명하겠습니다.
과학주의적 무신론, 강경한 환원주의, 그리고 이와 결합된 형태의 세속적 인본주의 비판은 과학주의가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과학적 설명으로 의미를 대체하려는 시도는 현상에서 당위를 바로 도출해내는 자연주의의 오류로 연결되기 쉽다는 점에서 비기독교적으로도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과학을 하면 신 같은 비과학적인 대상은 버려야 하는 거 아니냐는 대중적인 편견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내부의 흔들림이나 외부에서 새로 기독교를 믿으려는 사람들의 망설임을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책은 인간 심리·윤리에 대한 생물학적 기제 설명을 ‘진화론’이라는 표지로 묶어 제시합니다. 이때 책은 ‘환원주의’라는 철학 용어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환원주의적 해석을 뒷받침하는 데 자주 동원되는 과학적 설명들을 곧바로 ‘진화론’으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결과 진화론·환원주의·과학주의 사이의 구분이 흐릿해집니다.
그럼에도 이런 설명 방식에는 기독교 대중 변증이라는 책의 목적에 부합하는 실용성이 있습니다. 과학주의·강경 환원주의와 결합된 일부 세속적 인본주의 담론이 진화론을 세계관의 근거로 삼고 이를 종교 비판과 결합하는 현실을, 책이 상정하는 초심자에게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속 인본주의 내부의 스펙트럼이나 기독교 신학 내부의 다양성을 일일이 소개하기보다, 특정한 반기독교 세계관 하나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그와 대비되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는 편이 학습 부담이 낮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진화론을 무신론적 세계관에 귀속시키는 방식은 여러 문제를 낳습니다. 첫째, 생명의 기원(무생물에서 생명이 최초로 발생하는 문제)은 진화론(생명 집단이 변이·유전·선택을 통해 변화하는 이론)과는 별도의 연구 영역입니다. 진화의 핵심 메커니즘은 바이러스·미생물의 약제 내성, 실험적 선택 압력에서의 분화 등에서 반복적으로 관찰·검증되며, 유전학적 상동성이나 계통학적 일관성처럼 서로 다른 범주의 증거들이 수렴한다는 점에서 대안 가설들보다 더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둘째, 진화론의 이론적 지위를 약화하기 위해 책이 ‘과학’을 “재현 실험이 가능한 것”으로만 규정하는 대목은 과학철학적으로 문제를 남깁니다. 관측과 역사적 증거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역사과학들이 통제 실험 중심 과학과 동일한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지적은 타당하지만, 그 차이를 근거로 진화론을 ‘가설’로 격하하고 창조론과 동급의 경쟁 구도로 놓는 것은 역사과학이 사용하는 추론 기준(증거의 수렴, 설명의 통합성, 최선의 설명 추론 등)을 과학적 정당화의 범위 밖으로 밀어내는 효과를 낳습니다. 또한 이런 기준은 천문학·지질학·고생물학처럼 유사한 방법론을 쓰는 영역에서 과학 지식이 기술·정책 판단의 근거가 되는 방식까지 정당화 근거를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 진화론을 가설로 두면 유전자 편집, 병원성 세균과 바이러스의 변이 현상 등 진화론 위에 세워진 많은 과학 기술도 신뢰할 수 없는 가설 위에 세워진 조치에 불과해집니다. 물론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이론의 존재론적 함의를 유보하는 태도는 가능하지만, “이론은 믿을 수 없지만 성과는 신뢰한다”라는 태도는 이론의 진리 여부보다 효용과 성과를 우선하는 실용주의적 정당화, 그리고 이론이 말하는 비가시적 실재에 대한 확언을 보류하는 반실재론적 정당화 쪽으로 독자를 자연스럽게 이동시킵니다. 철학적으로는 정당한 입장일 수 있으나, 이 책이 다른 대목에서 자연의 질서와 인식 가능성이 창조주를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상충됩니다. 진화론 계열 이론에만 국소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적용하면, 과학을 필요할 때는 거리 두고 필요할 때는 방증으로 끌어오는 ‘선택적’ 사용이라는 비판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점은 진화론을 가설로 격하하는 것이 신의 존재를 설계로 방증하려는 글쓴이의 시도와 결부된다는 것입니다. 글쓴이는 복잡한 결정 구조, 거대한 물질 세계, 그리고 우주 상수나 태양계 구조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인류가 존속할 수 없다는 미세 조정 가설이 설계자 신이 있다는 합리적 개연성이라고 주장합니다. 현대 진화생물학은 생명의 영역에서 복잡한 구조가 설계자의 개입 없이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런 설계자에 의존하는 유신론을 취약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설계 논증을 흔드는 설명은 생물학의 진화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에서는 어떤 대상에서 고도의 정규성과 규칙성이 발견되면 “부인할 수 없다”라는 단정과 함께 곧바로 “의도적 생성”과 “지적 능력”으로 연결하지만, 이 연결은 과학적 사실의 서술이 아니라 해석의 도약을 포함합니다. 적어도 물리학과 재료과학에서는 규칙성이 출현하는 이유를 의도를 상정하지 않고도 에너지 최소화·대칭성·상전이 및 자기조립 같은 물리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질서가 관찰된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의도적 설계라는 결론을 내리려면 추가 전제가 필요하며, 그 전제가 명시되지 않으면 설득력이 약해집니다. 따라서 진화론을 가설로 내려서 설계 논증을 일부분 보호할 수는 있어도, 설계 논증이 마주치는 더 넓은 범주의 자연적 설명 가능성 앞에서는 임시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글쓴이도 설계 논증의 한계를 어느 정도 고려한 면은 있습니다. 이 논증이 신 존재를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다만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개연성 있게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독자에게 기대하는 반응도 “창조주 신이 있을 수 있겠다”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설계 논증을 본격적으로 펼칠 때에는 설계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았음을 “반드시”, “명백히” 등으로 강화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단정적인 수사를 쓰고 있어, 개연성을 제시한다는 글쓴이의 의도는 약해지고 독자에게는 현재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자연스럽게 신의 영역인 것처럼 이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 형식은 많은 신앙인에게 유효한 실천적 촉매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영역을 “설명되지 않는 간극”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지식이 확장되는 것이 곧 신앙의 영역이 좁아지는 것으로 이어지는 인식론적 취약성이 생깁니다. 지성과 신앙이 동시에 성장하려면 이 취약성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추가적인 안내가 필요하지만, 책은 그 점까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책은 과학주의적 반기독교 세계관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반기독교 논증은 여러 갈래가 있으며 그 중 강력한 하나는 ‘악의 문제’(특히 자연 악)입니다. “전능하고 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자연 재해, 기생 생물, 해로운 유전자 변이 같은 자연 악이 지속적으로 관찰되는가”라는 질문은 무신론적 결론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닙니다. 영역주권의 관점에서 특정 영역(과학주의 담론)을 선택해 정밀하게 대응하는 전략 자체는 타당합니다. 다만 설계 논증이 자연의 질서와 복잡성을 쉽게 신의 의도로 읽을수록, “자연 악 역시 의도의 산물인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어려워집니다. 자연 악을 다루는 신정론은 흔히 신의 직접 의도와 피조물·자연 원인의 작동을 구분하려 하지만, 의도 귀속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그 구분선이 흐려져 논리와는 별개로 독자에게는 책임 귀속이 신 쪽으로 기울어 보일 위험이 커집니다. 책이 설계 논증을 개연성 있는 이해를 위해 제시했다고 밝힌 대로, 필연적인 결론보다는 개연성 있는 방증으로 내려놓는 편이 이 위험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이 신정론적 부담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 다윈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흔히 다윈을 ‘진화론으로 기독교를 무너뜨린 적’으로 기억하지만, 다윈 자신은 젊은 시절 자연신학적 설계 논증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글과 전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난제는 ‘설명’ 이전에 ‘고통’, 곧 자연 악이 야기하는 신정론적 부담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다윈의 신앙을 단번에 무너뜨리기보다 오랜 시간 압박하며 마모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딸 애니의 죽음은 결정적 계기였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그 마모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언급됩니다. 이 사례는 “자연의 질서”를 곧바로 “선하고 전능한 설계자의 의도”로 연결할수록 자연 악의 부담이 급격히 커진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글쓴이가 이러한 세속 세계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지니고 사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입니다. 이 영역주권론은 기독교사회(크리스텐덤)가 쇠퇴하고, 계몽주의가 확산되고 자유주의 신학이 힘을 얻으며,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도가 주류에서 점차 밀려나는 19세기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합니다. 영역주권론은 세상은 하나님이 세우신 선한 곳이지만 인간의 죄악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뤄질 수 없는 곳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 위에서 교회·국가·사회·예술·가정·경제 등 각 영역이 고유한 통치권을 가지되, 그 모든 주권의 주인은 그리스도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각 영역에서 청지기로서 소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 영역은 서로 침해해서는 안 되어서, 국가가 교회를 침범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교회가 모든 영역을 침범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교회가 모든 영역에서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기독교사회와 구분되어야 합니다. 글쓴이도 기독교사회로 회귀하는 것에는 철저히 반대합니다.
이 영역주권론의 틀로 글쓴이는 세속 담론이 독점해 온 지성·언어·행복의 의미를 기독교적으로 재정의하려 합니다. 우선 지성의 영역에서는 성경이 지성과 지식의 추구를 긍정하고 지혜의 근본을 하나님(경외)으로 둔다는 대목을 근거로 듭니다. 언어와 의사소통의 영역에서는 세속 방식으로 정의한 용어를 기독교가 스스로 포기하려는 태도를 비판하며, 그 예로 “결혼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을 위한 것입니다”라는 표어가 기독교를 행복을 거부하는 종교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행복과 기쁨의 영역에서는 수난을 앞둔 그리스도에게 기쁨이 있었다(요 17:13)는 구절 등을 예로 들어, 그리스도인이 감당하는 고난과 십자가 역시 궁극적으로 기쁨과 연결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세속적 인본주의자인 라일 심슨의 주장을 바탕으로 세속적 인본주의의 행복이 “여기, 지금, 나”로 정의되는 반면, 기독교의 행복은 “여기·거기, 지금·그때·영원”을 함께 고백하는 믿음이라고 대조합니다.
이런 시도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나 신앙의 초보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반지성주의와 금욕주의를 극복하는 데에 유효할 것입니다. 동시에 지성만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반대쪽 극단도 십자가의 신비를 통해 경계합니다. 교회가 모든 영역에서 중심이 되지 않고도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제시하는 것은 특히 그리스도인이 소수자에 불과한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 수많은 비신자들의 영역을 존중하면서도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실천적 틀을 제시해 줍니다. 책은 구체적인 예시로 지성, 언어로 표현하는 개념, 행복과 기쁨을 제시했고, 더 나아가서 국가·사회·예술·가정·경제 등에서 이를 실천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신의 창조를 합리적인 개연성 수준에서 논증하려고 하면서도, 그 근거로 설계자 논증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이 지성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고백하는 방법을 제한합니다. 세상의 법칙과 질서가 하나님을 증명한다고까지 말하는 글쓴이의 진술은 초심자를 설득하기 위한 교육적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법칙과 질서가 우연이 아닌 설계자의 존재를 개연성 있게 입증한다고 주장하면, 법칙을 따르는 과정에 확률적·우발적 요소를 포함시키는 자연주의적 설명들과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쟁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면, 설계자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지성과 신앙은 대립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필요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책에서는 진화론이 역사 과학이지 실험 과학이 아님을 이유로 가설로 격하하면서 경쟁 설명의 설득력을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사 과학도 실험 과학처럼 증거의 수렴과 최선의 설명 추론을 통해 예측과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을 아는 독자는 이런 방식으로 설득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지성의 영역을 한 가지 방법으로 고정하기보다는 여러 안을 함께 검토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한 예로, 하나님의 목적을 제1원인으로, 자연 법칙을 제2원인으로 보면서 제2원인이 제1원인을 침범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섭리 신학에서는, 자연 법칙이 우발성을 포함하든, 초자연적인 개입이 있든 없든, 하나님의 목적은 여전히 유지됩니다.
영역주권론이 각 영역의 고유 원리를 존중하는 틀이라면, 3부에서 말하는 일반은총은 그 ‘고유 원리’가 어떻게 가능하며 신자·비신자가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신학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아버지 하나님은 선인·의인과 악인·불의한 자에게 모두 해와 비를 내리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확장한 것이 일반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는 축복인 특별은총입니다. 이 일반은총은 문화와 예술, 지혜와 양심 등 모든 영역에서 비기독교인과 기독교인에게 차별 없이 내려져, 뛰어난 세속 예술 작품, 선한 비그리스도인, 세속 주권자 등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를 기다리는 인내와 사랑,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는 일반 계시, 모든 창조 활동을 인간과 동역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일반은총을 베풉니다. 이 일반은총은 신자와 불신자에게 모두 공평하게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에 기대어, 특별은총은 각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고백되는 방법, 일반은총은 각 영역의 고유 원리가 기능하는 방법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에서 교회 생활이 대표하는 특별은총과 관련된 행위와 이 세상에서 삶에 필요한 일반은총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합니다.
책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조화와 균형을 판단할 수 있는 규칙은 주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예시와 질문을 던집니다.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하는 것이 더 올바른지는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의 균형을 잡지 않고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균형을 잡아 주지 않고 독자의 몫으로 남깁니다. 또 사무엘과 다윗을 견주어, 둘의 삶에서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의 무게추가 다르게 놓였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어떤 규범으로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의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지만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며, 책은 이 지점에서는 더 무리하게 나아가지 않고 멈출 곳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일반은총을 기독교인이 비기독교인의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 접점으로 표현할 때에는, 구체적인 실천을 하나의 방향으로 표현합니다. 그 예로 영화 〈왕 중의 왕〉을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수를 보편적 사랑이라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접점으로 표현했고 그 결과물은 비기독교인 중에서도 호평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의 가치를 표현하면서 상업성이 있는 영화의 가능성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경쟁과 약육강식의 원리가 강하게 작동하고 “성경적 창조질서”와 어긋나는 가치관으로 통치되는 세상에서 불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현실로 인정합니다. 그 자리에서 일반은총이라는 공통 분모로 신자와 불신자가 접촉한 후 특별은총이 불신자에게 전달되어 신앙 공동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모델을 제시합니다.
글쓴이는 세상을 비판하기 위해 분노와 우월감으로 거리로 뛰어드는 행위를 여러 차례에 걸쳐 비판합니다. 글쓴이가 견지해 온 크리스텐덤 비판과 영역주권론의 문제의식과 결합하면, 세상의 규칙을 기독교에 맞게 고치려는 열망이 크리스텐덤 복구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는 태도로 보입니다. 다만 이는 영역주권론 내에서도 여러 흐름 중 하나에 해당하며,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을 더 적극적으로 구성하려는 대안도 있습니다. 글쓴이는 “성경적 창조질서”라는 보수 기독교에서 주로 쓰는 용어를 썼지만, 결론을 정치 운동이 아니라 일반은총으로 세상과 접점을 찾아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라는 권면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책은 진화론을 한사코 가설의 자리에 묶어 두려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독교를 뒤흔드는 세 가지 주제를 세계관이라는 언어로 대처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과학자라면 마땅히 신을 부정해야 한다는 과학주의, 반대로 신앙에 지성은 필요 없다는 반지성주의, 그리고 교회가 모든 사회 영역을 지배해야 한다는 크리스텐덤입니다. 과학의 폭주를 막고, 지성으로 신앙을 지탱해 온 전통을 지키면서, 세속과 교회가 공통으로 대화할 수 있는 영역과 공존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 주 목적이기에, 그 세계관을 채우는 실천은 많은 부분 독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다만 진화론을 무신론의 기반으로 묶고, 설계자 논증으로 신을 변증하는 방법은 신앙 초보자에게는 유용하되 한계도 뚜렷합니다. 이 책의 세계관 틀로는 자연 악의 문제에 답하고, 다양한 과학적 지성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기술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신학적·철학적 작업을 모두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 플러스》가 가장 효과적으로 상정하는 예상 독자는 과학주의가 곧 과학이라고 인식하는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세계관 플러스》가 가장 효과적으로 상정하는 독자는 ‘과학’의 권위를 세계관·윤리·의미 판단까지 확장하는 대중 담론 앞에서 흔들리는 기독교 초심자들입니다. 이 책은 과학주의를 과학 자체로 오인하기 쉬운 독자에게, 과학의 범위와 신앙의 범위를 구분하도록 돕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다만 진화론을 ‘가설’로 격하하는 대목은 진화생물학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독자(기독교 내부의 유신진화론자, 다수의 비기독교인)에게는 오히려 대화의 접점을 좁힐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의도를 ‘진화론 반박’이 아니라 과학주의 비판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면, 진화론 논쟁을 넘어 과학의 권위가 삶의 영역을 재단하는 방식 자체를 성찰하는 계기는 될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가 진리라면 사회 전반을 지배해야 한다’는 크리스텐덤 직관을 약화한다는 점에서, 교회 내 정치적 열광과 거리 두기를 고민하는 독자에게도 유효성이 있습니다.
비록 신무환이 진화론을 격하하려는 시도의 비용은 크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필요성을 느꼈을 법한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하는 것 역시 현실입니다. 최정균의 《유전자 지배 사회》는 예상 독자와 진화론에 대한 시각이 신무환과는 정반대임에도, 같은 배경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과학주의가 대중 담론에서 강한 설득력을 획득한 사회 위에서 성립하는 책이라는 점입니다. 최정균은 과학의 권위를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적극 밀어붙였고, 신무환은 과학의 권위가 사회를 재단하는 것을 막고자 과학 이론 자체를 방어적으로 격하했습니다. 두 시도 모두 자기 자리에서는 선의 - 최정균은 사회 개혁, 신무환은 신앙 수호 - 에서 출발했지만, 설명과 당위의 층위를 끝까지 구분하지 못한 채, 최정균의 방식은 신무환에게는 신앙의 실존적 위협으로 인식될 수 있고, 신무환의 방식은 최정균의 관점에서는 유전적 조건을 넘어서는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사례로 남았습니다.
이 대비는 《유전자 지배 사회》의 마지막 장에서 과학에 부합하는 형태의 무신론·자유주의 기독교를 제안하는 대목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최정균에게는 과학적 세계관과 기독교가 공존할 길을 찾는 것이지만, 신무환에게는 과학주의가 신앙을 잠식한 결과로 보일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두 글쓴이의 시도는 상대를 부정하면서도, 같은 시대에 반응한 대칭적 해법으로 엇갈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