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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규 Aug 13. 2024

나는용 답(龖)에서 파생된 한자들

용의 힘으로 살아남은 엄습할 습(襲)

지난 글에서 다룬 한자들은 익힐 습(習)에서 유래한 한자들로, 겹치다나 작다의 뜻이 있는 한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중에서 엄습할 습(襲)과 같은 한자인 㦻이라는 한자가 있었다. 창 과(戈)가 뜻을 나타내고 習이 소리를 나타내는 한자로, 창으로 습격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자가 더 엄습이라는 뜻에 잘 맞는 것 같은데, 어쩌다가 襲이 엄습하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을까?

襲이라는 한자는 그 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이 글자의 뜻은 장례 절차인 염습도 있고, 인습(因襲), 답습(踏襲)처럼 무엇을 반복하거나 계승한다는 의미도 있다. 염습, 반복, 엄습 이 별 관계 없어 보이는 세 가지를 뜻할 수 있다. 게다가 구성은 용 룡(龍)에 옷 의(衣)가 위아래로 합한 것이니 형성자가 아니라 회의자 같은데, 용과 옷이 어우러져서 어떻게 저런 뜻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실은 이 글자는 회의자가 아니라 형성자다. 위쪽에 있는 게 원래는 龍을 두 번 겹쳐 쓰는 龖(나는용 답)이었다. 옛 글자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襲의 금문, 주문, 설문해자 소전. 출처: 小學堂

옛 글자인 금문과 주문에서는 龍이 두 번 반복해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용 한 마리를 생략해서 간략해진 것이 지금의 襲이다. 襲은 衣에서 뜻을 가져오고, 龖에서 소리를 가져온 형성자다.

龖이 소리를 나타낸다는 것은 이미 龖이 단순히 龍을 두 번 겹쳐 쓴 글자가 아니라 龍과는 독립적인 뜻과 소리가 있는 하나의 글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갑골문에서는 아직 龖+衣, 즉 ⿱龖衣(⿱AB는 A를 위에, B를 아래에 쓴 글자를 말한다)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龖은 존재한다.

갑골문합집 8197번과 여기에 써 있는 龖. 출처: 國學大師, 小學堂.

애석하게도 갑골문의 파손이 너무 심해서 龖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파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런 한자가 정말로 있다는 것은 보여준다. 지금은 龍을 서로 나란히 쓰고 있지만 갑골문이나 襲의 금문에서는 용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런 경우 나란히 서 있는 사람인 견줄 비(比)와 등을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인 북녘 북(北)처럼 조금 모양이 달라지는 게 보통이지만, 龍을 좌우로 뒤집는 것은 너무나 부담되는 일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龖(나는용 답, 급수 외 한자)에서 파생된 한자는 다음과 같다. 그 동안은 어문회 급수 한자 위주로 소개해 왔지만, 龖에서 소리를 가져온 한자는 그냥 한자 전체를 뒤져도 4자밖에 없으니 그냥 전부 소개하겠다.  

龖+衣(옷 의)=⿱龖衣→襲(엄습할 습): 습격(襲擊), 세습(世襲) 등. 어문회 준3급  

龖+言(말씀 언)=⿱龖言→讋(두려워할/자꾸지껄일 섭): 급수 외 한자  

龖+龍(용 룡)=龘(용이가는모양 답): 답답(龘龘), 급수 외 한자  

龖+龖=⿱龖龖(수다스러울 절): 급수 외 한자  

龖에서 파생된 한자들.

용이 두 마리 있으면 날아다니고, 용이 세 마리 있으면 가는데, 네 마리가 있으면 수다스럽다는 뜻이 된다(?).

이 수다스러울 절은 가장 획수가 많은 한자로 유명하다. 16획인 龍을 4번 반복해서 쓰니 16×4=64획에 달한다. 같은 한자를 네 번 반복한 획수 많은 한자로는 魚(물고기 어)를 네 번 반복한 44획의 䲜(물고기성할 업), 雷(우레 뢰)를 네 번 반복한 52획의 䨻(우렛소리 평)도 있으나 수다스러울 절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한다. 9종이나 되는 한자를 섞어 놓아 복잡하기로는 수다스러울 절을 능가한다는 뱡뱡면 뱡도 획수는 58획으로 수다스러울 절보다 적다.

왼쪽이 수다스러울 절, 오른쪽이 뱡뱡면 뱡.

다시 龖이 소리를 나타내는 유일한 상용 파생자 襲으로 돌아오자. 이 한자는 《설문해자》에서는 '옷의 앞섶이 왼쪽에 오는 옷'을 뜻한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전통 장례 풍습이다. 옛 중국에서는 옷섶이 오른쪽으로 오게 여미는 옷을 입었는데, 죽은 사람의 세계는 산 사람과 반대로 된다 해서 옷섶을 반대로 여미게 했다. 그래서 襲은 장례 때 죽은 사람에게 옷을 입히는 과정인 염습을 뜻한다.


다른 뜻인 겹치다, 물려받다, 엄습하다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주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로 오랫동안 그 존재가 숨겨져 있다가 최근에서야 발굴된 《계년》이란 책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습격, 계승의 뜻을 나타내는 襲을 여러 가지 특이한 한자로 가차했다. 그 중에 이런 한자가 있다.

《계년》에서 쓴 襲의 이체자 중 하나.

어떻게 하면 이렇게 생긴 한자가 나오는 것일까? 衣는 다른 한자와 결합할 때, 위와 아래가 벌어져서 그 사이로 한자를 집어넣는 경우가 많다. 口(입 구)가 들어간 哀(슬플 애), 里(마을 리)가 들어간 裏(속 리) 등이 있다. 위의 한자는 衣 안쪽에 衣가 또 들어간 한자로, 옷 안에 옷을 겹친 모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한자는 ⿴衣衣로 나타낼 수 있으며, ⿴AB는 A 안에 B가 들어가 있는 글자다.

위의 글자는 襲과 통용할 수 있으며, 겹침을 뜻하는 한자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이 글자는 갑골문에서도 나타난다.

갑골문합집 27959와 이에 써진 ⿴衣衣. 출처: 國學大師, 트위터 字伏/azafuse.

갑골문합집 27959번은 매우 희미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자세히 보면 ⿴衣衣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비록 결손이 너무 심해 이 글에서 ⿴衣衣의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衣衣가 갑골문에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하다.

이를 통해 襲의 기원을 해석할 수 있다. 본디 襲은 갑골문에서는 ⿴衣衣으로 써서 옷이 겹쳐 있는 것을 나타내는 회의자였으나, 금문에서부터는 음을 나타내는 龖과 뜻을 나타내는 衣를 합해서 襲으로 사용했다.


한편 《계년》에서는 유창할 답(譶)이라는 한자를 襲 대신 쓰기도 한다. 譶은 말씀 언(言)을 세 번 반복한 글자로 이에서 말이 빠르다, 유창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말이 빠른 것처럼 군대를 빠르게 움직여 치는 것이 엄습이니 譶에서 엄습이란 뜻이 나온 것일까? 애석하게도 譶에 宀(집 면)을 올려놓은 ⿱宀譶이라는 한자로도 襲을 대신하니, 譶은 형성자의 소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계년》는 ⿴門⿴衣衣라는 해괴한 한자로도 襲을 나타내는데, 襲 하나를 무려 네 가지 다른 글자로 나타내는 걸 보니 글쓴이는 독자들을 괴롭히려고 작정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계년》에서  사용한 다양한 襲의 이체자들.

그러면 대체 어디에서 襲의 엄습하다라는 의미가 나온 것일까?

엄습할 습의 본자로 추정되는 글자.

상나라와 주나라 초기에 쓰이다가 현재는 없어진 위의 한자가 있다. 결합 부호로 나타내면 ⿺辶⿰⿱一⿰幺幺卩로, ⿺AB는 B의 왼쪽과 아래쪽을 A가 감싸는 받침을 나타낸다. 이 글자가 바로 엄습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원래의 한자로 보인다. 이 글자는 꿇어앉은 사람을 나타내는 병부 절(卩)과 운행을 나타내는 한자인 쉬엄쉬엄갈 착(辵)이 합해서 기습한다는 뜻을 나타내고, 젖을 습(濕)의 본자인 溼의 생략형인 ⿱一⿰幺幺가 소리를 나타낸다. 본디는 이 한자가 엄습을 뜻했고 襲=⿴衣衣, 譶 등 다양한 한자가 이를 가차해 썼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襲만이 살아남아, ⿴衣衣, ⿺辶⿰⿱一⿰幺幺卩, 譶, 㦻 등의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홀로 겹치다와 엄습하다를 모두 뜻하는 한자가 되었다. 이것이 날아다니는 용을 머리에 지고 다니는 襲의 힘이었을까. 비록 용 한 마리는 잃었지만.


엄습할 습(襲)은 용 룡(龍)과 옷 의(衣)가 합한 한자 같지만, 실제로는 나는용 답(龖)과 옷 의(衣)가 합한 한자다.

龖에서 襲·讋(두려워할/자꾸지껄일 섭)·龘(용이가는모양 답)·⿱龖龖(수다스러울 절)이 파생되었다.

襲은 ⿴衣衣을 대신해 '겹치다', '인습하다', ⿺辶⿰⿱一⿰幺幺卩을 대신해 '엄습하다'의 뜻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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