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번영은 서방교회가 집약적 친족 제도를 해체한 결과다
지난 글에서는 《위어드》 본문의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씁니다.
글쓴이는 이 책을 스스로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확장판이라고 평합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이 근본 원인이 아니라 현대 서구 사회로 가는 종착 단계이자 '부스터 샷'이었다고 분석하고, 결정적인 단계는 집약적 친족 제도를 해체한 “결혼 가족 강령”의 도입이라고 보여주는 것이 차이일 것 같습니다.
책에서 강조하기를, 어떤 제도의 영향력과 결과는 그 제도 안에서 사는 사람이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비록 많은 문화권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할 뿐이지 장려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기독교만큼 일부일처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인 문화권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서방 교회는 구약성경에서도 허용하는 사촌 간 결혼을 금지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프로테스탄티즘, 개인주의, 민주주의, 산업화라고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글쓴이는 위어드한 사회의 평가 지표와 집약적 친족 제도의 평가 지표를 만들고 이 둘을 연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집약적 친족 제도가 강한 사회일수록 서구화에 저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책에서 위어드의 특성으로 내놓은 것이 대부분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자살률 증가 빼고), 서구 위주의 편향적인 책이라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중국, 한국, 일본은 강력한 중앙 정부라는 위어드에 가까운 특성 때문에 빠르게 서구화했음에도 집약적 친족 제도 때문에 여전히 위어드하지 않은 사회로 평가받습니다. 책에서는 한국과 일본에서는 친구의 죄를 숨겨주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그 예로 듭니다. 중국도 개인적이지 않은 이타성이 아닌, 개인적 이타성인 '꽌시'로 유명하죠. 그러나 한국의 젊은 세대로 갈수록 위어드에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집약적 친족 제도의 기반이 되는 많은 것들이 한국에서는 해체되고 있습니다. 과연 한국 사회는 정말 위어드해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철승의 《쌀, 재난, 국가: 한국인은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대충 훑어보았을 뿐이지만,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문화가 바로 쌀농사 문화에서 비롯한다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쌀농사 문화가 민주주의 제도와 맞지 않는 문화 지체를 낳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위어드》의 분석을 참고하면 쌀농사 때문에 집약적 친족 제도가 강해졌고 이는 민주주의의 기반과 충돌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쌀, 재난, 국가》를 읽으면서 《위어드》에서 나온 집약적 친족 제도와 민주주의 등 위어드 특성 사이의 음의 상관관계를 감안하면 흥미로운 분석이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쌀, 재난, 국가》에서 지적하는 문제는 그저 위어드의 관점에서만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흔히 창의력과 창조성을 한 천재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 등에서 보여주는 최근의 연구 결과에서는 이는 창의력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결과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창의력과 창조성은 당대의 시대정신에서 비롯한 것이고, 때에 맞는 모방과 약간의 변주에서 비롯하며, 단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집단지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오히려 더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구 사회에서 다른 문화를 압도하는 혁신과 창조가 일어난 원인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런 오해의 원인, 곧 혁신과 창조를 만들어낸 '개인'이 있어서 그에게 명예와 부귀가 돌아가야 한다는 관념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의 창의력 연구는 발명을 이룩한 개인의 공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에서 인정받는 발명과 발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위어드 문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혁신이 일어날 수 있게 하도록 위어드 문화를 발전하는 길을 열어 주는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또 다른 책이 있는데 《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입니다. 갑자기 웬 개신교, 그러니까 프로테스탄티즘 책이냐고요? 위어드의 특징 중 하나가 잘못하면 수치심 대신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명예에 기반을 두고 집약적 친족 관계에 어울리며, 죄책감은 개인주의에 어울리고 개인주의는 존엄성을 강조합니다. 《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에서는 기독교적 용서는 수치와 명예의 문화가 아니라 존엄성 문화에 기반을 두는데 서구 사회가 수치와 명예를 강조하는 옛날 이교 사회의 원칙을 되살리면서 용서가 미덕이 아닌 것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거든요.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반발을 넘어서서 위어드의 본질적인 특성마저도 바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마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에서도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수치심을 법에서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반박하고 있는데, 이는 서구에 수치심을 강조하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증거 같습니다.
글쓴이의 마지막 지적은 세계화로 인한 혼란과 극단주의 창궐을 겪는 현대 서구 사회에 경종을 울립니다. 한동안 서구 사회는 비교적 위어드한 사람들끼리만 교류했고, 덜 위어드한 사람들까지도 위어드하게 바꿔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는 집약적 친족 제도를 보편주의적 교회와 개인주의적 결사체로 바꾼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서구 사회가 집약적 친족 제도를 강력하게 보존해 온 무슬림들을 이민자로 받자, 이들은 서구화에 저항했고, 동화되지도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지도 않는 무슬림들을 이웃으로 두게 된 유럽인들은 극단주의에 경도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위어드한 사회와 집약적 친족 제도에 의지하는 사회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전에, 위어드한 사회와 집약적 친족 제도에 의지하는 사회가 서로 같은 도덕 기반 위에 있다고 착각한 것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해야 합니다.
'결혼을 몇 명이랑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해?' '사촌이랑 결혼 못 한다고 나라가 뒤집어지나?' '믿을 건 가족뿐인 건 당연한 거 아냐?'
그것 때문에 산업혁명이 못 일어날 수도 있다면, 민주주의 국가가 못 될 수도 있다면, 너무 극단적으로 책 내용을 줄인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