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탐 17
33.
선호는 아침 알람 소리에 깬다. 그리고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여자친구의 결별을 알리는 카카오톡이 와있다. 장문의 카카오톡을 읽어본다. ‘그동안 철석같이 믿고 사랑했는데 실망이라고, 너의 집에 갔을 때 다른 여자의 머리끈이며 너에게 오던 핸드폰 연락, 그리고 다른 향기들을 확인했을 때의 그 실망감과 좌절에 대한 감정들’을 적어놨다. 언젠가 벌 받을 거라는 저주의 글도 적혀있다.
‘그래 내가 다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지 뭐.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선호는 속으로 되뇐다. 그리고 민정에게서 온 카카오톡도 읽는다. ‘잘 잤어? 오늘도 파이팅. 오늘 퇴근 후 회 먹자.’
선호는 잠이 덜 깬 눈을 반쯤 뜬 채 미소를 지으며 카카오톡에 답장을 남긴다. ‘좋아. 맛있겠다. 얼른 퇴근하고 싶다.’
선호와 민정이 만나기 시작한 지는 2주 정도 되었다. 단체 회식 이후 젊은 직원들끼리 2차를 가고 3차를 가고, 또 집에 가는 길에 따로 민정님과 연락을 하여 4차. 그 후부터 따로 만나고 있다. 그동안 여자친구에게는 연락이 늦어지고, 변명과 거짓말을 하다가 이내 여자친구가 집으로 들이닥쳤고, 다행히 민정은 없었지만 그 흔적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여자친구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를 잡지 못했다. 나쁜 남자가 된 것이다. ‘미안하다. 좋지 않은 추억을 줘서. 나도 벌 받겠지.’
선호는 속으로 생각하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세수를 하고, 옷장에서 옷을 고른다. 오늘 패션은 청 셔츠에 회색 면바지다. 패션을 좋아하는 선호의 옷장엔 셔츠와 면바지가 종류별로 많이 걸려있다. 옷을 입은 후 집 앞 편의점으로 간다. 번화가의 원룸에 사는 선호의 집 앞 편의점은 24시간 운영한다. 선호가 아침에 방문하는 시간에는 야간에서 아침으로 아르바이트생이 바뀌는 시간이다. 남자에서 여자로. 아침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귀엽다. 대학생으로 보이는데 휴학을 한 건지 평일 아침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주 청순해 보인다. 긴 생머리에 동그란 눈, 키도 꽤 큰 편이다. 늘 청순한 이미지로 다소곳하게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는데 선호는 계산대에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본다. 그녀도 의식을 하는 건지 선호가 바라볼 때 항상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다.
오늘도 편의점에 방문하니 그녀가 어서 오세요 하며 가늘고 높은 톤으로 인사한다. 선호는 삼각김밥과 초콜릿우유를 계산대에 내밀며 말보로 담배 1갑을 달라고 한다. 역시 오늘도 그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선호의 카드를 받아 결제를 하고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내민다. 선호는 일부러 카드를 받으며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터치면서 받는다. 삼각김밥, 초코우유, 담배를 챙겨 밖으로 나간다. 아침의 편의점 루틴이 선호의 하루 시작을 상큼하게 해 준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삼각김밥과 초콜릿우유를 먹고는 담배를 피운다. 깊이 마셨다가 내뱉는다. 카카오톡이 온다. 민정이다. 이제 출근한다고 한다. 선호도 이제 곧 출근한다고 답장을 한다.
출근한 선호는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앉는데 민정의 카카오톡이 온다. ‘누가 여자탈의실을 훔쳐봤다고, 지금 다연님이 관리팀장에게 CCTV 확인 요청했다고, 범인은 아마 동현 님일 거 같다고, 그 시간엔 동현 님 밖에 없다고’ 한다. 선호는 놀래서 저 멀리 동현 님을 바라본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업무를 보고 있다. 항상 안경너머 작은 눈에 검은 피부의 포커페이스라 지금 그의 심리 상태를 잘 모르겠다. 곧이어 관리팀장이 다연님을 부르고 같이 CCTV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관리팀장과 다연님, 동현 님이 회의실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그대로 동현 님은 퇴근했다.
CCTV로 밝혀진바 동현 님이 아침마다 남자탈의실로 들어가서 한동안 나오지 않았고, 본인도 실험실에서 여자탈의실을 염탐했다고 인정했다 한다. 따로 휴대폰 촬영은 하지 않았고, 다연님이 경찰에도 신고를 해서 경찰 조사도 진행될 거라고 한다.
선호와 민정은 카카오톡으로 염탐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주제로 계속해서 대화를 했고, 민정이 피해자임을 안 선호는 마음이 아팠고, 전혀 그런 인물일 줄 몰랐던 동현 님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에 충격을 받았다.
34.
최근에 동현, 다연, 민정, 선호 넷이서 술을 마셨을 때 동현이 술을 먹다 말고 선호에게 여자탈의실의 방향제에 몰카 기능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선호는 당황했다. 사실 그 방향제에 몰카 기능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3번째 방향제에는 몰카 기능을 탑재하여 여자탈의실에 둘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시나리오로 선호의 친구가 접근했었다. 대학 시절의 동창 친구.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고, 같이 술을 한 잔 했고, 같이 담배도 폈다. 그러다 갑자기 친구가 얘기를 꺼낸 거다. 방향제에 탑재된 몰래카메라로 촬영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고. 아는 지인이 그걸로 돈을 번다고 한다. 몰래 촬영해서 업체에 넘기면 돈을 준다고. 부업으로 어떠냐는 거다. 선호는 손사래를 치며 그런 일은 범죄라고 걸리면 감옥 간다고 버럭 했다. 선호의 과한 액션에 친구는 의외라며 네가 그렇게 바른 청년이었냐며 비꼬았다. ‘그건 바른 청년을 떠나서 기본적으로 범죄 행위니까 그런 거’라고 하며 친구에게 조언을 한 선호였다. 친구는 알겠다고 다음에 생각 있으면 말하라고 하면서 차 트렁크에서 방향제 1박스를 줬다. 이거 몰래카메라 탑재 된 거냐고 선호가 묻자 친구는 아니라고, 이 박스 말고 저 박스라고 하면서 트렁크 안쪽에 있는 박스를 가리켰다. 이건 카메라 탑재하기 전 방향제라는 거다. 대신 싸구려라 향이 금방 빠진다고 했다. 보통 이 싸구려 방향제 2번 정도 설치했다가 카메라 탑재된 걸로 바꾼다고 한다. 그러면 감쪽같다고 한다. 선호는 친구에게 ‘그런 일 손 떼라’고 다시 한번 조언을 하고는 헤어졌었다.
근데 동현 님이 술자리에서 그 카메라 얘기를 꺼낸 거였다. ‘동현 님이 그런 걸 어떻게 알지’라고 생각했었다. 선호도 친구에게 듣고는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마치 하지도 않은 범죄에 누명을 쓸까 봐 선호는 동현 님의 말이 무서웠다.
그런 동현 님이 결국 여자 탈의실을 몰래 훔쳐본 죄로 퇴사를 하고 경찰 조사를 받는다.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른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방향제를 줬던 동창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방향제 그거 써봤냐는 거다. 선호는 써봤다고 향은 좋은데 진짜 향이 금방 사라져서 계속 교체해야 하더라고 했다. 친구는 그거 얼른 다 써라고 한다. 전에 얘기했던 그 지인이 몰래카메라 하다가 걸려서 경찰 조사받는 중이라고 혹시나 여파가 본인과 선호에게도 올 수 있으니 증거를 없애라는 거다. 본인도 갖고 있는 거 다 폐기했다고 한다. 안 그래도 향이 금방 떨어져서 열심히 교체하다 보니 이제 거의 다 써간다고 선호는 얘기했다. 다시 한번 선호는 ‘자기가 전에 한 말이 맞지 않냐고, 나쁜 짓 하다가 한방에 나락 간다’고 다시 한번 친구에게 조언한다.
동현 님의 사건으로 한동안 회사가 어수선했다. 그동안 선호는 매일같이 민정과 데이트를 했다. 근데 어느 날 민정과 같이 술을 진탕 마신 날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민정이 기분이 상해서 다음날 연락하지 말라고 한다. 선호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따로 실수한 건 없는 거 같은데 술을 같이 진탕 먹고 놀다 보니 어떤 말이 오갔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밤에 민정이 싫다는데도 계속해서 민정에게 스킨십을 하고 너무 욕구를 드러냈던 거 같다. 어쩌면 민정이 선호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은 없고 몸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민정과의 결별로 선호는 한동안 세상을 잃은 느낌이었다. 민정의 차량 번호와 비슷한 차량 번호가 지나가면 혹시나 민정인가 고개가 돌아가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직장 동료로만 지냈고, 집에서는 괜히 외로워 혼자 소주를 들이켰다. 그럴 때마다 안 좋게 헤어졌던 전 여자친구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들여다본다. 외로우니 예전의 떠났던 여자가 생각나는 선호다.
그렇게 공허하게 지내던 어느 날 퇴근 후 친구와 술을 먹는다. 다음날 연차라 술을 많이 먹어도 된다고 생각한 선호는 요즘 공허한 심경을 친구에게 토로하며 술잔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필름이 끊긴 채 눈을 떠보니 그의 집 침대였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친구도 자고 있는지 받지 않는다. 친구에게 카카오톡으로 ‘어제 집에 어떻게 왔지’라고 메시지를 남기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옆으로 걸쳐 앉는다. 머리가 무진장 아프고 세상이 돈다. 구역질이 나올 거 같아서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고는 이대로 가면 하루 종일 죽을 거 같아서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제라도 하나 사 먹어야겠다’ 생각하며 집을 나선다. 담배도 다 떨어져서 같이 사야겠다 생각하며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간다. 역시나 평일 아침이라 청순한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어서 오세요’라고 하며 청량한 톤으로 인사한다. 선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한다. 아직 술이 덜 깨서 살짝 비틀거리며 걷다가 매대에 어깨를 부딪혔다. 냉장 코너로 가서 숙취해소제 1병을 꺼낸다. 여러 음식들이 눈에 띄지만 바라보니 괜히 속만 더 안 좋다. 카운터로 가서 숙취해소제를 계산대에 건네며 말보로 1갑을 달라고 한다. 하얀 맨투맨을 입은 청순한 아르바이트생은 또 머리카락 한쪽을 귀 뒤로 넘기며 말보로 1갑을 카운터 뒤편에서 꺼내 계산대에 놓고는 총 9000원이라고 얘기한다. 선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려는데 아차 지갑을 안 가져왔다. 선호는 저도 모르게 ‘아 지갑을 놓고 왔네 휴’ 말하고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다시 문밖으로 나간다.
집으로 돌아간 선호는 침대 옆 협탁에 있는 지갑을 발견한다. 얼른 챙겨서 다시 편의점으로 향한다.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서 오세요’ 하며 청순한 아르바이트생이 으레 문이 열리면 하게 되는 인사말을 하며 고개를 계산대 너머로 내민다. 선호는 비틀거리며 계산대 앞으로 가서 카드를 내민다. 아르바이트생은 또 머리카락 한쪽을 귀 뒤로 넘기며 결재를 하고는 카드를 두 손으로 내민다. 선호는 술이 덜 깨서 저도 모르게 카드를 잡으려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선호는 깜짝 놀라서 ‘죄송합니다. 어제 술을 좀 많이 먹었더니’라고 변명을 하며 굽신거린다. 아르바이트생은 ‘아 네 괜찮아요’ 하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웃는다. 그러면서 갑자기 ‘잠시만요’ 하며 자리를 뜨더니 매대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챙겨서 가져온다. ‘이거도 같이 드세요’ 하면서 비닐봉지에 넣어준다. 선호는 ‘앗 감사합니다 괜찮은데’라고 하며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서는 그대로 자리를 뜨기 아쉬워 혹시 ‘전화번호 받을 수 있냐’고 묻는다. 평소라면 못했겠지만 술이 덜 깬 선호의 가슴은 용기가 충만하다. 거절의 아픔을 숙취가 방어해 줄 거라 생각한다. 의외로 청순한 아르바이트생은 ‘네 핸드폰 줘보세요’ 하더니 자신의 번호를 찍어준다. ‘이름이?’ 하고 물으니 김민정이라고 한다. 선호는 이름을 입력하려다가 잠깐 머뭇거린다. 왜 최근에 잠깐 선호의 곁에 머물렀던 여인과 이름이 같단 말인가. 어떻게 저장해야 하나 고민하며 ‘연락드릴게요 고마워요’ 하고는 눈웃음 지으며 편의점을 나온다. 새로운 민정과의 행복한 설렘을 상상함과 동시에 옛 민정과의 짧은 사랑이 계속해서 떠오를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지는 선호다. 오늘은 편의점 앞이 아닌 원룸 뒤편에서 담배를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