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각되다

염탐 16

by 도파민경제

31.
동현은 똑같은 시간에 집을 나와서 똑같은 시간에 차를 탄다. 오늘도 신호 막힘없이 빠르게 달린다.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민정님의 차는 보이지 않는다. 선호님의 차도 보이지 않는다. 사무실로 들어간다. 혜정 님이 반갑게 인사해 준다. 승현 님은 오늘 연차라고 하신다. 남자 탈의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는다. 또 선호님의 캐비닛을 열어본다. 늘 똑같다. 담배, 라이터, 구겨져 구석에 짱 박힌 옷들. 옷을 다 갈아입고 내부 쪽문을 통해 실험실로 들어간다. 실험실 내부와 연결된 여자탈의실 창문 앞에 쭈그려 앉는다. 시트지가 떨어진 조그만 공간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캄캄하다. 그때 사무실에 누군가 들어오며 크게 인사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여자다. 민정님이겠지. 여자탈의실을 들여다본다. 곧 문이 열린다. 불이 켜진다. 회색 운동화의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들어온다. 민정님이다. 오늘은 청바지에 회색 티셔츠를 입고 왔다. 청바지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긴 다리와 히프다. 동현은 침을 꿀꺽 삼킨다. 이제 옷을 벗을 거다. 근데 또 여자탈의실 문이 열린다. 누군가 또 들어온다. 회색 운동화의 청바지다. 브랜드가 다르다. 민정님은 나이키 운동화에 진한 청바지. 그다음 들어온 여자는 뉴발란스 운동화에 연한 청바지. 연한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다연님이다. ‘다연님이 왜 이렇게 일찍 왔지. 늘 사무실 꼴등으로 출근하는 분인데.’ 동현은 괜히 불안하다. 민정님만 있으면 지켜보기 편하고, 혹시나 들킬 염려가 덜한데, 한 명 더 추가되니 염탐하는 죄책감이 늘어나고, 들킬 염려가 추가된다. 그래도 쭈그려 앉은 엉덩이와 다리가 무겁다. 쉽게 일어나지 못하겠다. 이대로 얼어붙은 동상이 될 거 같다.


둘은 옷을 갈아입으려다 말고는 무슨 얘기를 한다. 그러더니 다연님이 탈의실 안에 있는 바퀴가 하나 빠진 의자를 낑낑대며 끌고 온다. 그러고는 캐비닛 앞에 세운다. 그러면서 신발을 벗고 의자를 올라간다. 민정님은 옆에서 의자가 흔들리지 않게 붙들고 있다. ‘옷을 갈아입으려다 말고 뭐 하는 거야.’ 동현은 의아하다. 캐비닛 위에는 방향제가 있을 건데. 그걸 꺼내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있는데 다연님은 의자에서 한동안 내려오지 않는다. 동현은 이제 자리를 떠야 한다는 직감이 온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본능이 말하고 있다. 자리를 떠야 한다는. 근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다리가 저리다. 쥐가 낫다. 윽. 한쪽다리를 펴보려 했지만 펴지지 않는다. 고통스럽게 동현은 바닥에 주저앉는다. ‘다리 쥐가 왜 안 풀리지 이상하네 여기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데’ 하며 인상을 잔뜩 구긴다. 그러면서 힐끔 여자탈의실 안을 들여다보니 민정님이 갑자기 동현이 있는 안쪽 창문 쪽으로 걸어온다. 큰일이다. 동현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기어간다. 왼쪽 다리가 너무 아프다. 쥐가 풀리지 않는다. 왼쪽 다리를 질질 끌고 기어가서 남자탈의실 쪽문 문을 잡고 힘겹게 열어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캐비닛을 잡고 오른쪽 다리로 힘겹게 일어난다. 왼쪽 발 끝을 다리 쪽으로 세워서 종아리를 계속 쭉 펴고 있는다. 서서히 쥐가 풀리는 느낌이 든다. ‘방금 여자탈의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갑자기 민정님이 안쪽 창문 시트지 쪽으로 걸어왔다. 구멍이 있는 걸 발견한 건가. 큰일이다. 훔쳐보고 있던걸 발견한 건 아니겠지. 발견했을까. 얼른 나가자. 얼른 나가서 자리에 앉아 알리바이를 만들자.’

동현은 힘겹게 남자탈의실을 나간다. 그리고 인상을 구기며 힘겹게 절뚝거리며 자리에 앉는다. 그 모습을 본 혜정 님은 어디 아프냐고 물었고, 동현은 갑자기 왼쪽 다리에 쥐가 낫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탈의실 창문 커튼 너머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심장이 크게 뛴다. 이게 범죄자의 마음일까.


32.
어제 다연이 근무 중에 선호님이 오더니 방향제 하나를 건넨다. 여자탈의실 방향제 다 쓰면 교체하라고 한다.

“벌써 바꾸기는 이르지 않을까요?”
“집에서 써봤는데 싸구려인지 향기가 금방 빠지더라고요. 집에 이제 몇 개 안 남아서 들고 왔어요. 금방 교체해야 할 거예요.”

다연은 고맙다고 하며 책상 위에 둔다.
다음날 다연은 알람을 평소보다 40분 일찍 맞추고는 알람이 울리자마자 벌떡 일어난다. 팀장이 자꾸 늦는다고 눈치를 줬다. 이젠 일찍 출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면서 습관도 고쳐보자. 다연은 어제 퇴근길에 마트에서 산 딸기를 씻어먹는다. 다연은 과일을 좋아한다. 금방 배가 찬다. 소식가라 이 정도면 아침은 충분하다. 그러면서 냉장고에서 바나나우유를 하나 챙겨서는 가방에 넣어둔다. ‘혹시나 배고플 때 마셔야지’ 생각한다.
세면대로 가서 세수를 한다. 이마에 여드름이 났다. 나이 30세에 무슨 여드름이란 말인가. 뜬금없이 여드름이 나서 속상하다. 앞머리가 이마를 덮는 게 싫어서 항상 이마를 훤하게 드러내고 다니는데, 여드름이 눈에 많이 띌 거 같다. 이마에 여드름 나면 누가 좋아하는 거라던데. 동현 님인가 선호님인가. 아 선호님은 여자친구 있다 했었지. 그럼 동현 님인가 보네. 다연은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생각 속으로 빠지며 세수를 한다. 이젠 옷을 고르러 옷장으로 간다. 아침에 옷 고르는 게 가장 머리 아프다. 패션에 워낙 감각이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다연은 예쁘다고 입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너무 올드하다고 핀잔을 준다. 그래서 더 신경 쓰인다. 그냥 편하게 마음대로 입고 싶은데 괜히 다른 사람의 평가가 거슬린다. 그래서 최대한 무난하게 입으려 노력한다. 연한 청바지에 분홍색 카라티를 꺼낸다. ‘분홍색이 내 까만 피부에 너무 안 어울리려나, 연한 청바지랑 입으면 또 올드하다 하는 거 아냐?’ 괜히 신경이 쓰이지만 딱히 다른 옷은 입을게 보이지 않는다. 요즘 귀찮아서 세탁을 안 했더니 옷이 대부분 세탁기에 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출근해야지’ 다연은 얼른 옷을 입고는 원룸을 나간다.
처음으로 일찍 회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항상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 찰 때 왔었는데, 주차장의 절반이 비어있다. 주차를 하고는 사무실로 향하는데 50m 앞에 민정님이 걸어가는 게 보인다. 진한 청색 스키니진에 회색 라운드티다. ‘예쁘네’ 다연은 민정님의 뒷모습을 보며 예쁘다고 생각한다. 하얀 피부에 긴 다리, 적당한 히프. 청바지에 회색티가 아주 잘 어울린다. 괜히 마르기만 하고 까만 피부의 본인과 비교가 된다.
사무실로 들어가며 모기만 한 소리로 인사를 하는데, 귀가 밝은 혜정 님이 반갑게 인사를 해준다. 일찍 오니 사무실에 혜정 님만 있다. 동현 님도 일찍 온다고 했는데, 아직 자리에 보이지 않는다. 남자 탈의실 창문 커튼 너머로 불이 켜져 있는 거 보니 탈의실 안에 있나 보다 생각한다. 다연은 어제 선호님이 방향제를 새로 준 게 생각나서 잠깐 자리에 가서 책상 위 방향제를 챙겨 여자 탈의실로 간다.
여자 탈의실에 들어가니 민정님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어쩐 일이에요. 웬일로 일찍 왔어요?”

“팀장님이 눈치를 줬어요. 이제 일찍 오려고요. 아 그리고 선호님이 어제 방향제 새로 줬어요. 싸구려라서 향이 금방 빠진다고 교체하래요.”

민정의 크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물음에 다연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답한다.
그리고는 여자탈의실 한쪽에 방치된 바퀴가 하나 빠진 의자를 질질 끌고 캐비닛 앞으로 온다. 신발을 벗고 올라간다. 올라갈 때 의자가 덜컹거리며 흔들리자, 민정님이 의자를 잡아준다. 캐비닛 위에 있는 방향제를 집어서 냄새를 맡아보니 정말로 향이 많이 빠져있었다. 기존 방향제는 민정님께 건네고, 새로운 방향제를 캐비닛 위에 올린다. 이번엔 블랙체리 향이다. 향이 아주 새콤하고 매력적이다.

“향 너무 좋아요”
“맞아요 너무 좋아요”

다연이 민정에게 얘기하고 민정이 답한다.
다연이 내려가려 하는데 실험실 쪽이 눈에 띈다. 안쪽 창문 시트지 위로 30cm 정도 시트지가 붙어있지 않은데 불이 꺼져있는 실험실 창문으로 햇빛이 이제 막 들어오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햇빛이 들어오는 실험실 풍경이 아름다웠다. 그러다 시트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시트지 아래쪽에 왠 컴컴한 실루엣이 보인다. ‘저곳엔 저렇게 큰 물체가 없을 텐데.’ 다연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민정님에게 얘기한다.

“민정님 안쪽 창문 시트지 뒤에 무슨 실루엣이 보여요.”
“그래요? 여기서는 잘 안 보이는데”

민정이 대답하며 안쪽 창문 쪽으로 걸어간다. 그때 갑자기 안쪽 창문 시트지 너머의 검은 실루엣이 사라진다.

“여기 시트지 아래쪽 끄트머리가 살짝 떨어져 있어요. 여기로 실험실이 다 보여요. 실험실에서도 여자탈의실 볼 수 있겠는데요. 여태 몰랐네요.”

“방금 의자 위에서 검은 실루엣을 봤어요, 누가 밖에서 훔쳐본 거 같아요.”

민정과 다연은 서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