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와의 전쟁 (1)
한국에서는 북유럽을 흔히 '복지 천국'이라고 말한다. 교육도 공짜, 의료비도 공짜, 연금도 많이 받아서 노후 걱정이 없는 나라. 맞다,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그런데 그만큼 그 혜택을 위한 세금을 정말 많이 낸다. 소득이 많든 적든 똑같은 비율로 내고, 모든 사람들은 세금을 제외한 월급을 받는다. 물론 소득이 아주 많은 고소득층은 여기서는 고소득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한국에 비해서는 고소득도 아니다 유럽은 생각보다 월급이 그렇게 많지 않다 요즘은 한국보다 적다, 그 추가 금액에 대한 부분에서 50프로가 넘는 세금을 내기도 한다. 아무튼 아무리 많이 세금을 내더라도 그만큼 돌려받는다는 사회적 약속과 믿음이 있으니 대부분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한 불만은 없는 것 같다(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에 한에서는).
SFI. 내가 시작한 어학 스쿨, '스웨덴에 온 이민자들을 위한 스웨덴어 수업' 역시 이러한 복지 혜택 중 하나로, 퍼스널 넘버를 가지고 스웨덴에 살고 있는 이민자들은 누구나 신청만 하면 무료로 스웨덴어를 배울 수 있다. 수업 퀄리티는 복불복이지만 개인적으로 좋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어 시험 결과를 받은 후 영어에 대한 욕심을 잠시 접고, 그들의 조언대로 스웨덴어를 먼저 시작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래, 이제 스웨덴에 계속 살 건데 스웨덴어를 배워놔서 나쁠 건 없다.'
스웨덴어 과정을 신청하는 사이트에서 수강 신청을 하고 난 뒤 몇 주 후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가기 전, 학교 관계자 같은 사람과 간단한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디서 왔어?"
"스웨덴에는 왜 온 거야?"
"한국에서 너는 어디까지 공부했니? 고등학교? 대학교?"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어? 그 일은 얼마나 했어?"
"스웨덴어를 빨리 배워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니? 예를 들어 빨리 직업을 구해야 한다거나..."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되었고, 아무래도 내가 영어를 얼마나 알아듣고 할 수 있는지, 내 나라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는지 아닌지 등 간단한 백 그라운드를 알아보기 위한 것 같았다. 각자의 백 그라운드와 니즈에 따라 반을 배정하는 듯했다.
"아참, 그런데 한국 가전제품이 정말 좋더라. 나도 이번에 이사하면서 LG 텔레비전을 샀어. 다른 것보다 조금 비쌌지만 후회는 없어. 정말 좋아!"
"다음에 가전제품을 살 때는 더 많은 제품들을 한국걸로 바꿔보려고 해"
금발의 인자하게 생긴 인터뷰어는 나에게 친근감을 표시하고 싶어서인지, 정말로 단지 한국 제품이 너무 좋아서 말하고 싶어서인지, 인터뷰도중 자신이 한국 제품을 얼마나 잘 사용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먼 곳 스웨덴에서, 스웨덴 사람한테 한국 제품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들을 수 있다니. 뭔가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인터뷰 후 몇 주 정도 또 지났을까. 시내와 가까운 한 학교가 배정이 되었다는 안내 메일을 받았다.
수업에 들어간 첫날, 꽤 널찍한 교실에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모두 다른 피부색, 다른 머리색, 다른 눈동자색을 하고 있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많은 여자들, 딱 봐도 나보다 열다섯 살은 어려 보이는 앳된 여자들이 히잡을 쓰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인종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모습을 처음 경험은 처음이어서 처음에는 조금 당황도 됐고, 약간 무섭기도 했다. 우리의 선생님은 내 또래의 젊은 여자였는데, 자신도 역시 '이란에서 온 이민자'라고 설명했고, 스웨덴어를 배우기가 쉽지 않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잘할 수 있게 된다는 격려의 말도 해주었다.
우리는 첫 시간에 내 이름은 ooo이야, 어느 나라에서 왔어, 나는 지금 oo에 살아 등 아주 간단한 자기소개를 스웨덴어로 배우고, 파트너를 정해 말하는 연습을 했다. 수업 전 인터뷰를 하고, 대충 그 수준에 맞는 반을 배정받아서 그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유창한 영어를 사용할 줄 알았고, 내가 느끼기에 내가 제일 영어를 못 하는 듯 선생님도 우리가 알아듣기 힘든 문법이나 어휘는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스웨덴어는 영어와 대부분의 알파벳이 비슷하지만, 세 개의 다른 추가 모음이 있었고, 몇 개의 알파벳은 영어와는 다른 발음이 나서 정확하게 발음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스웨덴어 특유의 '노래를 부르는 듯한' 악센트가 있어서 악센트가 딱히 없는 한국어가 모국어인 나는 처음에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고, 너무 생소했다. 왜 이렇게까지 다양한 악센트를 넣어서 말해야 하는지 이해도 가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 후 도대체 몇 년 만에 무려 4시간도 넘는 시간 동안 내리 앉아 강의를 듣고 있는 건지. 허리와 엉덩이가 아프고 좀이 쑤셔 몇 번이나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는지. 중간에 한 번 있는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나와서 '아... 그냥 집에 갈까'라는 생각을 떨쳐내려 노력했는지. 영어로 하는 강의도 생소한 내가 그것도 다른 언어를 영어 강의로 듣고 있다니. 수업이 끝난 뒤 집에 와서 낮잠을 깨지 않고 두 시간은 잤던 것 같다.
쉽지 않네. 스웨덴어.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계획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나 혼자 덜렁 캄캄한 동굴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아무도 나에게 그 끝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 캄캄한 곳. 나 혼자 외롭게 묵묵히 싸워야 하는 외국어와의 싸움, 그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