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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화래진 Sep 13. 2020

슬기로운 대학원 생활

2주

 운명의 상대가 대학원에 있었다. 이렇게 마음 맞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니 행복했지만 동시에 불행했다.


 발표가 총 두 번 있었다.(발표가 없는 수업이 없지만 운이 좋아서 두 번 뿐이었다) 어느 정도 틀이 있는 자유주제였고 발제는 순전히 나의 선택이었다. 학부생(뇌가 말랑말랑하고 창의적이며 아이디어가 샘솟는)들과 듣는 설계스튜디오에서 첫 번째 일이 벌어졌다.


 공평하게 사다리 타기로 순서를 정하고 앞 발표자의 표지를 보는 순간 소리를 질렀다.(비대면 수업의 이점 1) 나와 같은 주제를 그것도 나와 같은 정보를 계속해서 나열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말도 잘하네. 나랑 겹치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해 끝까지 집중해서 들었지만 내가 준비한 거에 99%를 이야기하고 말았다. 내 차례가 오자 교수님께 이실직고했다. 겹치는 게 많은데 생략할까요?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고 나는 이름만 이야기하고 거의 날리다시피 말을 하다가 중간에 허탈해서 한 번 웃고 마저 날렸다. 폰트도 엉망이고 내 발표도 엉망이고. 그러고 다음 차례에서 나의 사랑스러운 동기와도 겹치고 말았다. 나의 운명의 상대들... 다음에 밥이라도 함께 하고 싶다.


 항상 완벽하다고 느낄 때 가장 불안하다. 왜냐면 완벽해본 적이 없기 때문.  목요일의 뼈아픈 고통을 맛보고 발표 준비라도 연습해서 가자는 마음으로 완벽하게 준비한 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나는 어제의 데자뷰를 맛보고 말았다. 자유주제였던 것 같은데 틀에 박혀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앞서 다른 학우분이 나와 같은 주제로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코웃음이 나왔다. 당일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강했다. 준비한 것을 전부 이야기하고 교수님의 컨펌을 기다렸다. 다행히 대상은 겹쳤지만 각자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달랐다. 하지만 나의 의도는 본래 앞서 말한 학우분의 설명에 가까웠음을 후에 인정했다. 


 항상 사주에서 내 곁에는 경쟁자가 있다고 했다. 내가 물장사를 하려고 하면 앞, 뒤, 좌, 우로 물장사를 할 거라고. 일이 겹치니(비록 두 번뿐이지만) 좋지 않은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애써 무시하고 다음 과제를 작성하다가도 주춤주춤 손이 멈춘다. 내가 생각한 걸 다른 이도 생각했을까. 안전하고 싶은 건 나뿐만이 아닌 건가 싶어 모험을 해보려고 한다. 중간만 하고 싶은 나의 의지가 이렇게 한풀 꺾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남들과 다른 것, 나만 할 수 있는 것으로 가겠다.


 자료도 없고 모험이지만 누군가와 겹치는 일보다는 훨씬 낫다고 판단한다. 겹치게 되는 순간 비교대상이 되는 건 물론이고 내가 너무 당황을 하니 말하려던 바를 전부 이야기하기가 힘이 든다. 내 목표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전하고 그에 맞는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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