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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하게 Feb 02. 2024

금쪽이가 자라서 부모가 되면 어떻게 될까.

어릴 때 가장 즐겨보던 프로그램 중 하나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였다.

울고, 떼쓰고, 째려보고, 때리고, 욕하고, 자해하고, 입을 닫고 온갖 종류의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던 아이들의 잔상을 기억한다.


언젠가 친구가 "애들은 그냥 작은 악마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투가 야박하긴 하지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그 말을 전적으로 부정하긴 어려울 거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TV에서 나오면 채널을 늘 멈췄다.

방송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정상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정신에 이상이 있거나, 귀신이 들린 것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런데 신기하게도 전설의 오은영 박사님이 등장하면 아이들은 단 며칠 만에 천진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 비포와 에프터가 너무나 경이로웠다.

그리고 진짜 내 마음을 이끌었던 건 바로 문제 아동 부모의 모습이었다.


오은영 박사는 문제 행동을 일삼는 아이들의 원인을 90% 이상 부모에게서 찾았다.

감정을 받아주지 않거나, 너무 강압적이거나, 반대로 너무 허용적이거나,

방치했을 경우 아이들에게 이상 행동이 나타났다.

내 눈에는 보였다.

나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아이들 마음의 소리가.


행동분석결과를 듣는 부모들은 죄인처럼 울며 자책했다. 진심으로 반성하는 듯 보였고,

오 박사가 제시한 솔루션을 착실히 따랐다.

그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악마 같았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모의 품으로 와락 달려들었다.


그때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모든 아이들의 바탕에는 부모가 있는 것이로구나.

부모가 달라지면, 사랑을 주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구나.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겠지만 방송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같은 루트를 통해 많이 호전되었고, 나는 늘 감동했다.


그때 같이 방송을 보던 그 시절 나의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이상한 애가 태어나서
저 부모도 참 피곤하겠다.


그렇다.

같은 방송을 보고도 전혀 다른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가 나의 엄마였다. 


방송 속에 나오는 부모들은 아이에게 가정불화 환경을 노출하고, 때로는 욕을 하고, 과도하게 행동을 통제하거나, 아이 발달을 방해할 정도의 과한 허용으로 아이를 망쳤을지언정

자신의 과오에 반성하고 변하려는 양심은 있는 분들이었다.

나는 방송에서 자식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짓는 그 부모들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엄마와 함께 방송을 볼 때면 내심 '엄마도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곤 했지만 언제나 더 큰 실망으로 돌아왔다.


그랬다.

엄마는 방송 속에 나오는 아이를 힐난했다.

오은영 박사가 아이가 하는 이상행동의 원인에 대해 열변을 토해도 엄마에겐 설득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상한 애들 우는 꼴 보기 싫다며 채널 돌리기를 종용했다.




요즘 방영되는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 아이들의 잘못된 행동만큼이나 부모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관련한 토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예전보다 더 부모 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은영 박사는 아이문제에 관한 솔루션 제시에 앞서 부모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갖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질문 앞에 고개를 떨구며 말을 잇지 못한다.

"저희 엄마는요...."로 시작하는 아픈 사연에 패널들도 함께 눈물을 훔친다.

그들은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 부모의 모습 그대로 행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하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식이 금쪽이라며 부모자격으로
방송에 나온 그들은
결국 스스로가 금쪽이였음을
고백하며 눈물지었다.


전문가들은 말한다. 가정에서 이뤄지는 아동학대는 대물림된다고.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한 아동이 성인이 돼

자녀에게 같은 방식으로 상처를 전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슬픈 아이러니...

그 적나라한 사례가 '금쪽같은 내 새끼"아닐까.


어려서부터 그런 류의 육아채널을 봐온 탓일까.

나는 여성의 몸으로 태어나 꼭 한 번 아이를 품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으면서도,

부모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두렵게 느껴졌다.

결혼을 하고, 임신을 계획하는 일이 당연한 수순이었고, 행복한 일이었지만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불안이 도사렸다.


나도 TV에 나와 자신의 정서적 학대를 고스란히 물려주고

후회하는 부모 중 한 명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정서적 학대가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다는 '가능성'에 압도돼,

내 인생의 도전과 행복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정상적인 부모가 되는 방법에 대해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준비 없이 나를 낳아 키운
 내 부모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고.

시작점은 내가 정할 수 없었지만
내가 걸어갈 방향은 이제 내가 정하겠다고.


그때부터 육아 유튜브며, 육아서를 닥치는 대로 찾아보고 읽었다. 그런데 찾아보고 나니 허무했다.

'정말 이거였어?'

아주 본질적이고 단순한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육아에 있어서 어떤 기술도 결국 본질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짓 없이 표현하고, 정서적으로 지지하고, 기댈 곳이 되어주는 것 말이다.

'자기 주도 유아식 하는 법', '수면독립 하는 법', '떼쓰는 아이 달래는 법' 같은 것보다 더 상위개념이었다.


내가 내 부모에게 바랐던 것도 이거였구나.

그때 깨달았다.


내가 원했던 건 부모의 여유로운 경제력도, 넘치는 교양도 아니었다.

느껴지는 '사랑', '인정' 그 자체였던 거다.


이 본질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육아에 대한 접근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아이에게 물질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해줄 필요도 없었고, 현란한 육아스킬을 구사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는 잘 키우려 낳는 게 아니라, 사랑하려고 낳는 거예요."라던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의과대학 소아청소년정신의학과 지나영 교수의 '본질육아'의 강의를 듣고 나는 완전히 감을 잡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더 이상 스스로를 정서적 학대의 희생양인 금쪽이로 치부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불행은 글로 풀어내고, 과거에 묻어두고,

이제는 엄마보다 더 나은 엄마가 되는 데에 온 힘을 쏟자고 스스로를 도닥였다.


그리고 세상에 보여주기로 했다.

금쪽이가 부모가 되더라도 달라질 수 있다고

정서적 학대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다고

장사도 실패해 본 사람이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는 법.

지독한 상처로 아팠던 만큼, 내가 아팠던 길로만 가지 않아도 절반은 성공이라는 마음으로


그날 이후 나의 육아는 너무 즐겁고 신비로운 것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린 시절의 나도 같이 키웠다.

그때 필요했던, 듣고 싶었던 따뜻한 말들을
아이에게 전부 쏟아낸다.

"사랑해, 소중해, 미안해, 고마워"
그 말을 내 딸도 듣고,
나도 듣는다.

내 딸도 웃고,
그때의 나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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