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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Feb 14. 2024

'나르시시스트 엄마'로부터 얻은 것

딸아 나를 가여워하지 말으렴

이제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친정엄마는 내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참 내 인생 기구하지 않니?"

그 말을 들을 때 진심으로 공감했다. 어린 마음에 '아마 이 세상에 우리 엄마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을 거야. 이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한 권도 넘게 채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었다.


고작 10살 즈음의 어렸던 나에게 자신의 오만가지 감정을 가감 없이 털어놨던 엄마가 실은 '나르시시스트'였다는 건 불과 몇 년 전에야 알았다.


전문가들은 나르시시스트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동정심과 죄책감을 유발'을 든다. 

자신이 가정과 딸을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설명한다는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을 발견했을 때 난 잃어버렸던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단 이 부분만이 아니라 나르시시스트의 모든 특징적인 행동이 소름 돋을 만큼 일치해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어째서 엄마의 주변엔 그토록 못된 사람들만 있는 걸까 늘 궁금했었다.

그 궁금함을 풀어줄 열쇠는 '나르시시스트'였다.

자신의 희생을 강조해 자녀로부터 죄책감을 유발하고

행동과 사고를 제한한다는 잔혹한 특성은 내 유년시절의 복사본과 다름 없었다.


나의 유년과 청소년기 대부분의 감정은 엄마를 가여워하는데 소비됐다. 내 존재가 엄마에겐 삶의 무게일 거라 짐작했기에 많은 순간 괴로웠다.


내가 자라 어른이 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야 모든 상황이 객관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엄마의 자리에 내가 서고 보니 아이는 너무 작았다. 어째서 내 엄마는 이토록 작은 아이에게 인생의 짐을 덜어보고자 했던 것일까.


세상에 불쌍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삶의 무게와 서러움이 있다.

그 무게를 아이와 나눠지려 하거나 그 원인을 아이에게 돌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내 엄마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였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 이후부터 나는 엄마와 다른 방향으로 걷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다.


그중 철칙으로 지키는 것이 바로 '자식 앞에서 한탄하지 않기'이다.

점심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화, 살면서 겪었던 당했던 모든 부당한 일들, 불행했던 성장환경 등등 그 이야기를 아이에게 마치 인생설화인양 떠들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아이가 자라 "엄마의 삶은 어땠어?"라고 물으면 그때 담담히 털어놓을 것이다.


내가 나르시시스트 엄마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접어둔다.

친정엄마에 대한 원망조차 사그라든 지금
나의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하나의 교본과 같다.
정확히 반대로 쓰여있는...


나의 결핍을 마주하는 과정은 때로 고통스럽지만 내가 원하는 길을 밝혀주기도 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관용구가 한때는 무책임한 글귀로 읽혔지만 이제는 마음으로 끄덕일 수 있게 됐다.


나는 오늘도 '나르시시스트 엄마'가 내게 보인 지도의 반대편으로 뚜벅뚜벅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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