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담 Mar 11. 2024

당신의 불행이 핑계에 지나지 않는 이유

전문가의 설명을 통해 불행을 대물림하는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근본적인 사유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아주 단편적인 명제에 불과할 뿐이다. 남성과 여성의 사유구조가 각각 다르고, 자존감이 낮은 엄마일수록 딸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그 고통에는 무감하다는 특성. 그것이 엄마가 내게 가한 정서적 학대의 정당한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정서적, 물리적으로 엄마에게서 분리된 지금에서야 다양한 심리학 담론이 객관적으로 와닿는다. 엄마에 대한 애증에 매몰되어 있을적엔 전문가들의 조언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기에 외면하기도 했다. 

당시에 이 내용을 접했다면 엄마에게는 그러한 특성이 있으니, 그 모순을 품어야한다고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내게 했던 행동이 단순 '편애'가 아닌 여성의 구조적 특징에서 기인한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에너지를 소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다르다. 

가여운 나의 엄마는 내게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젠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엄마는 내게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됐다. 본성을 무책임하게 따라서는 안됐다. 자신이 어린시절 겪었던 상처를 트로피처럼 고백해선 안됐다. 자식이 엄마를 가여워하도록 유도해선 안됐다. 자신의 엄마가 그러했듯 아들에게 치우친 편애의 마음을 드러내선 안됐다. 

아플지언정 내면의 상처를 직시했어야 했다. 자신의 과거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어야 했다. 자신의 엄마가 그러했듯 자신과 딸을 동일시하지 않았어야 했다. 


모든 어른에게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물려줄 의무가 있다. 불행의 뒤에 숨어 학대를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의무를 다하지 않은 어른은 존경받은 권리마저도 잃게 된다는 걸, 결국엔 뿌린것보다 더 혹독한 외로움의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이젠 안다.


성찰하지 않는 부모,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부모는 자격이 없다. 

세상의 모든 종(種)이 그렇듯, 진화하지 않는 것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이제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나의 엄마가 아닌 나 자신이다. 

나의 엄마, 엄마의 엄마, 아마도 엄마의 엄마의 엄마에게서 대물림해 온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와 딸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정서적 학대를 가해온 그 특성이 나를 잠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여성의 구조적 사유가 흐르는 물길과 같은 것이라면 결코 그 흐름을 순순히 따라가지 않을테다. 발버둥치며 나아가 육지로 올라서고 말 것이다. 


절대로 딸에게 나와 같은 과거를 물려주진 않을테니까. 

이전 29화 엄마는 어쩌다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