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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Oct 24. 2016

'칠드런 오브 맨'을 보고

한 인물의 선택과 신성에 대하여

1.


 칠드런 오브 맨을 봤다. 모니터에 커서가 깜빡이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물론이고. 이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픽션을 구상하는 자들이 벽 바깥에서 세상에 종말을 부여하는 방식은 참으로 많은 시도들 속에서 다양하게 있어왔다. 미지의 문명과 조우하며 속수무책으로 세계가 붕괴하는 상황도 있었으며, 태풍이나 지진, 빙하기의 시작 등 자연재해의 모습으로 종말이 찾아오기도 했다. 인간 문명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포화상태에서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혹은 초국적 정부 혹은 집단의 음모로 새로운 통제사회를 맞이한 미래 세계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 속의 세계관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이유는 너무나 단순한 이유다. 인간의 불임, 그것의 통제 불가능한 확산. 이 단순한 이유로 세상은 혼돈에 빠지고, 집단적 반란과 쿠데타가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무기로 자행되었다. 그 결과로서의 사회, 아니 이미 무너진 문명 속 최후의 보루로서 존재하는 영국이라는 국가주의적 무력집단이 새로운 사회를 간신히 유지시켜나가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사회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태중의 아이가 점점 유산되고, 그 유산되는 시기가 앞당겨진다는 것을 인류가 알게 된 후, 더 이상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다. 영화의 시작에서 '가장 어린 인간'이 총격 사태로 숨지고 전 인류가 슬퍼하는 모습에서부터 이 세계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전 지구적 전란의 상황에서 마지막 무력집단인 영국으로 건너온 불법 이민자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다. 온 거리의 광고에서는 불법 이민자들을 신고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세계의 마지막 국가로 향한다. 그들이 믿는 유토피아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건너온 그곳은 국수주의에 기반한 차별이 제도적으로 정착한 디스토피아였다. 이 무채색 허무주의적 세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묘사한 '더 로드'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더 로드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종말 속 단독자로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영화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장 이 영화에 대해 무언갈 말하려 한다면 국수주의, 디스토피아, 무정부주의 등의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하다. 국가가 개인의 자살을 종용하며, 개인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더 이상 인류는 존속 불가능하다는 이 절망의 세계는 더 로드에서 보여지는 무채색의 종말보다 더욱 어두워보인다.



2.


 이곳에서 주인공 파론은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던 젊은 활동가였으나 오래전 자식을 잃은 뒤 의지를 꺾고 사회 속에 주저앉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한 파론이 계속해서 반정부주의 활동을 이어온 자신의 전처를 통해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전처가 리더로 속한 집단인 피시단은 반란을 도모하며 자신들이 보호하는 한 소녀를 휴먼 프로젝트의 모선인 '투모로우'로 보내려 한다. 전처와의 소진되지 못한 유대와 거액의 돈을 동기로 이 계획에 동참한 파론은 피시단이 꾸린 계획의 진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소녀 '키'를 투모로우로 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소모하며 사건의 중심에 뛰어든다.


 탄탄한 시나리오는 영화의 구조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세계관과 주요 인물들의 동기,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를 아주 능숙하게 짧은 시간 동안 설명한 전반부가 지나가면 캐릭터들은 자신이 속한 상황에서 지극히 당연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움직인다. 젊은 활동가였던 파론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다시 사회 속에서 개 같은 기분으로 일어나고 개 같은 기분으로 출근하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목숨을 걸고 키를 보호하기 위해 사건에 뛰어드는 모습은 모든 관객들에게 쉽게 납득된다. 사건의 흐름이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조력자에서 다른 조력자로 옮겨가는 모습 또한 영화 전반의 잘 닦인 뼈대 위에서 무리 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의 끝에서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숨을 멈춘 채 숭고함과 신성과 거룩함을 목도할 것이다.


 이 묵시록적 세계에서 이러한 신성을 담은 인물이 키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을 것이다. 키는 성경의 메시아를 암시하는 듯한 대사를 던지지만, 곧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아주 어린 소녀의 전형적인 모습만을 보여준다.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약간 과도하게 신경질적이며 어쩔 수 없이 의존적이다. 자신이 겪은 상황이나 스스로가 품어낸 이 기적적인 사건의 의미도 알지 못하는 듯하다. 영화 내내 아이의 이름을 구상하고, 절망적 상황에서 난 못해, 소리 지를 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의 태동을 느끼고 아이와 조우하는 등, 새로운 생명은 그 주어진 의미를 떠나 키에게 아주 개인적이고 초월적인 의지를 부여한다.


 다만 아기일 뿐인 작은 생명은 그 충격적이고 놀라운 롱테이크 신을 거쳐 세상에 공개된다. 그 위대한 생명이 전란의 순간 잠시나마 경외와 침묵을 가져온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키'는 그렇게 '투모로우'를 만난다. 의지를 이은 이름을 새로이 가진 채.



3.


 놀라운 것은 시나리오의 견고함이나 새로움, 놀라운 영화적 연출뿐만 아니라 이야기 속에 가장 깊이 존재한다. 모두가 키를 자신의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가운데 온전한 선의의 목적으로 그녀를 도운 것은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몇은 자신의 정의를 관철하는 정치적 집단이거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지위, 혹은 처우를 개선하려는 개인이 아니다. 키를 도운 자들이 공통적으로 사회 외곽에 있거나 이러한 정치적 싸움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그리고 그중 몇은 히피, 혹은 동양 신앙에 기원한 신비주의자들로 묘사된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결국 온전히 그녀를 투모로우에 데려다준 인물은 조소적인 회피자, 파론이었다. 


 키의 아이가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되는지, 투모로우로 향한 그들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결말 후, 암전과 함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선명하게 퍼지는 것이 영화 후의 이야기를 암시한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 캐릭터와 이야기, 연출과 음악 모두가 좋다. 다시 훑어보니 나는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에 꽤나 호의적인 편이었다. 이 영화의 탁월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모든 시간과 공간을 응축하여 긴장감을 극단적으로 고조시키고 관객들을 강하게 흡입한 영화 후반부의 그 길고 긴 롱테이크 신은 너무나 놀라웠다.





+ 더 로드는 소설만 읽었는데, 이것 역시 영화로 나왔구나. 한번 살펴봐야겠다. 그리고 칠드런 오브 맨의 원작 소설도.

++ 줄리안 무어와 마이클 케인은 등장 시간도, 비중도 그렇게 크지는 않은데 왜인지 모르게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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