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화제작사에게 보내는 주저 없는 신뢰
신뢰라는 것은 상대의 믿음이나 기대에 계속해서 부응했을 때 얻어지는 보상이다. 마블 스튜디오는 관객의 믿음, 혹은 기대에 지속적으로 부응해왔으므로 그동안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어왔고, 닥터 스트레인지 역시 그 중심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들은 계속해서 대중성과 오락성을 획득해 흥행에 성공해 왔으며 종종 윈터 솔저와 같은 멋진 작품들도 있었다. 다분히 오락거리로서 히어로 영화를 즐겨보는 나에게는 마블 스튜디오만큼의 훌륭한 콘텐츠 제작집단은 찾아보기 힘들다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이제 내겐 마블 스튜디오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다. 그들에게서 나온 영화라면 무엇이라도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외과의사인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어떤 사고를 겪은 후 자신의 인생을 가능케했던 능력을 상실하여 절망한다. 절망 속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하던 그는 마지막 희망으로서 어떤 미신적인 장소에 기대를 걸고 그곳에 찾아간다. 그곳에서 스트레인지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고, 새로운 능력을 얻어 우주를 지키는 소서러 수프림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몰랐던 세계에 닥쳐온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야기의 중심으로 뛰어든다.
이제 마블 스튜디오의 시나리오는 거의 공식의 단계를 확립한 듯싶다. 특히 히어로의 시작과 근원을 알리는 각 영화의 1편과 같은 경우에는 아주 전형적인 추락과 상승의 이야기로 굳어져버렸다. 이 지점은 상당히 영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위험성을 수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관객은 그리 멍청하지 않다. 계속해서 영화를 뽑아내는 마블 스튜디오의 팬들은 그들의 이야기 작법에 대해 이제 대부분 짐작이 가능한 지점에 와 있으며, 이미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에 같은 뼈대를 사용한 마블 스튜디오는 이 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고민을 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캐릭터를 활용하고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엮어나가는 것에 아주 탁월했던 마블은, 새로운 캐릭터를 출동시키며 그의 이야기 역시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에도 아직 사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무궁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이야기 구조 역시 아주 단순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 부족할 것 없는 완벽한 인물이 자신의 능력을 상실하는 일련의 사건을 겪고 절망을 체험한 뒤,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수 없이 반복된 이 지리한 히어로물의 탄생기를 이번 마블은 현란한 시각적 이미지와 역동적인 상상력으로 극복했다. 첫 씬부터 관객의 눈을 사로잡은 이 영화는 내내 지루할 틈 없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화려하게 이끌어나간다. 다차원과 고차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복잡한 대화로 설명하기보다는 시각적 이미지로 관객을 설득시킨다. 마치 에인션트 원이 스트레인지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는 것으로 그를 굴복시키는 것과 같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프랙탈 이미지들과, 원색적인 이세계의 기묘한 이미지들은 지금까지 영화에서 보아왔던 것들과는 분명 다르다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들 역시 곳곳에 존재한다. 이야기가 해결되는 구조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 물론 복선들은 존재했지만 그것만으로 보다 강력해 보였던 빌런을 쉽게 무너뜨리는 것은 더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렇게 멋진 캐스팅 라인을 확보하고도 그들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 역시 아쉽다. 매즈 미켈슨에게 더 많은 비중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의 백 스토리와 타락의 과정이 보다 깊이 있게 그려졌다면 그의 연기가 더욱 선명했을 것이다. 틸다 스윈튼은 여전히 신비롭도록 아름답지만, 그리고 그녀의 무성적, 초연적 외모는 이곳에서도 탁월하게 적용되었지만, 그녀는 캐스팅의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유머는 꽤 곳곳에서 적절하게 터져 나온다. 대부분 주인공 스트레인지를 통해 등장하는 이 유머들은 현실세계 속에 마법이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삽입했을 때 나타나는 비틀림에서 얻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예고편에서도 나온 와이파이 패스워드(패스워드인 샴발라는 티벳불교에서 전해져 오는 전설의 왕국의 이름이다). 스트레인지의 오만하고 이기적이지만 이타적이고 유머러스한 개성은 이 영화에서 훌륭히 살아있다. 이 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후속작들과 이 인물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과 엮여나가는 과정들을 즐겁게 기다릴 것이다.
+ 그나마 매즈 미켈슨이어서 실소 없이 빌런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아닌 다른 인물이 연기했다면.. 웃음이 터져 나왔을지도..
++ 첫 영화에서 많은 것들을 보여주느라 이야기의 연결구조가 너무 단순한 점이 있다. 인물들이 너무 쉽게 힌트를 내어주고 허락하며 지도하고 깨닫는다. 물론 이런 것들에게는 장단이 함께 존재하기에 이 영화의 치명적인 약점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 마지막에 자신의 아이템들을 내려놓는 스트레인지를 보며 2편을 더욱 기대하게 되었다. 두 개의 쿠키영상 역시 마찬가지. 마블은 정말 영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