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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Nov 01. 2016

(번외)'봄의 정원'을 읽고

분더캄머를 열어보게 하는 기묘한 소설

“<봄의 정원>은 기억과 만남의 이야기입니다. 낯익은 듯한 풍경 속에서, 그리운 사람 혹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먼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입니다. 꼭 천천히 읽어주세요.”



 때로 무언가를 기억하고자 하면 힘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분명 내가 겪었던 일이고 내게 있었던 일이었을 텐데도 기억 속 장면들은 대부분 어떤 프레임 속의 사진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진 속 장면들을 손을 뻗어 더듬어가며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그 사진은 초점이 아주 엉터리로 맞춰져 있어 군데군데 얼룩처럼 읽어낼 수 없는 부분이 많은 사진이다.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인상이 흐릿한 채, 그에 대한 감각만이 남아 아주 아련하게 저장되어 있다. 우리는 그런 기억 속 사진들을 들춰보며 과거를 추억한다. 그래서 모두는 오류를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 날의 정확한 시간, 그들의 이름, 나눴던 대화, 호흡한 공기, 그 날의 냄새 같은 것들을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어렴풋한 감각과 감정밖에는 없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이런 기억의 오류들을 넘어서 어떤 순간들을 기억하고자 자신들의 기억과 연관된 것들을 수집하여 한 방에 모아두었다고 한다. '분더캄머'라고 불린 그 방에는 온전히 담길 수 없는 무엇들이 각자의 기억들을 아로새긴 채 조용히 숨죽여 존재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둡고 조용한 방을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게 그 단어를 알려줬던 사람의 기억이 내겐 '분더캄머'라는 단어 자체로 남아있기 때문에.


 작가의 말처럼 나는 이 책을 참 오래도록 천천히 읽었다. 짧고 명료한, 그러나 독창적인 문장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책은 다분히 감각적이다. 이 책은 계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장소에 대해 오래도록 설명한다. 꽃과 나무, 벌레와 구름과 하늘과 눈송이 같은 것들을 순서 없이 계속해서 묘사하는 이 순수한 문장들은 기묘하게도 이 책의 장소인 봄의 정원을 넘어 다른 장소 속에 나를 끌어 넣는다. 이것은 참으로 신기하지. 책은 너무나 명료한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만 나는 오히려 엉뚱하게 내 기억 속 다른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다니. 아무튼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이걸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주인공 다로와 니시, 그리고 어느 순간 화자로서 갑자기 등장한 다로의 누나인 나. 이들 간의 관계 속에서 이렇다 할 사건은 없다. 연립빌라에 사는 다로는 같은 빌라에 사는 니시가 옆집인 물빛의 집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니시는 자신이 그 집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그 집을 배경으로 찍은 어느 신혼부부의 사진집인 '봄의 정원'을 본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로는 우연한 계기로 주변인에게 그 사진집을 얻게 되고, 그 사진들 속에 담긴 부부의 일상을 조용히 들춰본다. 그리고 다로 역시 그 물빛의 집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는지 알고 싶어 진다. 이 책은 다로와 니시의 일상, 그리고 다로에게 남겨진 기억, 사진집 '봄의 정원'에 담겨 있는 젊은 부부의 단면들이 구름 흘러가듯 계속해서 쉬지 않고 천천히 흘려보낸다. 


 그리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니시와 다로는 그 집의 현재 주인과 친해져 그 집의 현재를 보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곤 모두 떠난다. 니시는 어머니의 간호를 위해 고향으로, 물빛의 집주인 역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고향으로, 도쿄의 그 공간은 곧 사라진다. 연립빌라의 마지막 주거자인 다로마저 떠나고 나면, 그 건물은 곧 헐리고 새로운 것들이 들어설 것이다. 사라진 것들을 덤덤하게 이야기하지만 어쩔 수 없이 쓸쓸하다. 다로와 니시가 물빛의 집의 현재에 대해 궁금해한 것은 당연하다. 결국 이 책은 기묘한 소설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모든 감각적 문장들을 통해 소설 밖 이야기들까지 소환하여 나를 쓸쓸하게, 혹은 추억 짓게 만든 기묘한 소설이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도 이 책이 계속해서 나의 기억과 감각을 자극한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 때문이다.


" 안주도, 맥주도 이제 다 떨어지고 없었다. 눈으로 뒤덮인 거리는 고요했다. 눈이 아니어도 이 거리는 고요한 지도 몰랐다. 하얀 결정 덩어리는 온기를 빨아들였다. 집도 나무도 전깃줄도 아스팔트도 공기도 밤도 온도가 낮아졌다."


++ 스마트폰이라던지, 내비게이션 같은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문득 소설의 장소성과 시간성이 환기되었다. 이것 역시 신선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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