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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Nov 01. 2016

'최악의 하루'를 보고

길을 걷는 하루, 일종의 은유

 이 영화는 계속해서 길을 걷는다. 길을 걷는 하루, 일종의 로드 무비. 여자는 세 명의 남자를 만난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은유로도 보이는 이 남성들은 각기 이 메타포에 대단히도 맞는 행동들을 보인다. 여자의 과거는 끈질기게 자신을 쫓아오고, 현재는 나를 자꾸 부정하며, 미래는 불투명하고 해석이 어렵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주인공 여성이 어떤 남성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 모두는 시간축 내에서 동일한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변화를 반복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바라본다면 어리둥절할 정도로 다를 때가 많다. 과거의 연인에 대한 감상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사람과 함께한 날들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시간들이었는지 떠올리면 눈물이 날 것도 같지만, 지금 와서 그때 내가 연애했던 방식이나 그 사람에게 바쳤던 헌신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물음표가 붙는다.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권태와 자기연민으로 점철된 현재가 지나가면 과거가 되고, 그것들이 언젠가는 미래였던 것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의 이름이 최악의 하루인 것은 물론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일이기에 그렇지만, 최악이라는 수사는 일종의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어느새 곁에 다가온 미래라는 환상, 그와의 마무리는 하루는 결코 최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즈음에서야 나는 이 영화가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 시작부터 영화는 솔직했지만, 그리고 중간중간 '이것은 이야기다'라는 암시를 보여주지만 마지막에 작가의 이미지와 현실이 겹쳐지며 아, 이것은 이야기였구나 하고 알게 된 것이다. 


 곤경에 처한 한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극단적으로 크고 넓은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존재의 내밀함이나 형이상학적인 깊이가 없더라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꽤 많은 주제를 던진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좋다. 하지만 역시 마지막에 보여지는 한예리의 아름다운 움직임과, 환상과 현실이 중첩될 때 나타나는 아련한 이미지는 이 영화를 충분히 좋음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 한예리는 충분히 매력 있으며, 이와세 료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넘어 또 좋은 연기를 펼친다. 이 영화를 한여름의 판타지아 이후 그 연장선상에서 아주 흡족한 영화라고 생각되는 것에 이와세 료의 영향이 있을까?

++ 김종관에 대해 사실 잘은 모른다. 헤이 톰이나 폴라로이드 작동법 같은 단편을 몇 번이나 보고 또 보긴 했어도 그의 장편에는 쉽게 눈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참 그 답다는 생각이 든다. 빛과 심도의 차이가 빚어내는 영상의 아름다움이라던지, 인물들의 대사보다는 눈빛과 몸짓으로 표현되는 심리묘사라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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