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그 세계에 대한 그리움
1.
6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어 번 더 봤다. 이번 명절에도 혼자 의자를 꺼내놓고 앉아 이 소설을 읽었다. 조금 더 인생을 살아가면 좋은 점이, 타인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이 전보다 조금씩 쌓여간다는 점이다. 이것은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더 풍성하게 들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든 책이든, 두 번을 읽고 세 번을 읽을 것. 정성일 아저씨가 주는 교훈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메타포인 스푸트니크는 소련이 발사한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주인공인 뮤와 스미레의 대화 속에 서로의 어휘를 잘못 이해하여 등장한 이 인공위성은, 러시아어로 '여행의 동반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83킬로의 차가운 쇳덩이가 우주의 암흑 속에서 지구 중력장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고 유영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 소설의 주제를 아주 쉽게 연상할 수 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평범한 초등학교 교사로, 여느 하루키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과 같이 고독하며 음악과 소설을 좋아하고 홀로 바에서 술을 마시며 종종 낯선 여성들과 잠자리를 하는 평범한(사실 전혀 평범하지 않다) 남자다. 허나 이 소설에서 다른 점은, 이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화자의 각별한 친구인 '스미레'와 그녀의 최초의 사랑을 쟁취해 간 연상의 여자 '뮤'다.
이 소설에선 인물들 간의 역학관계가 좀 중요하다. 화자인 나는 스미레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그녀는 일반적인 의미의 연애에는 관심이 없다. 성욕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화자인 나는 스미레에게 용암과 같은 끓어오를 성욕을 느끼지만, 그는 그녀에게 친구사이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종종 그가 담당하는 학생의 어머니와 한 달에 두어 번 잠자리를 가지는 것으로 성욕을 해소한다. 그러나 그런 여자 친구들에게 그는 사랑을 느끼진 않는다.
스미레는 평생에 걸쳐 소설을 써야겠다는 열망 외에 다른 욕구는 느껴본 적이 없는 여자다. 그것은 마치 들풀이 언젠가 꽃을 피우듯 당연한 것이었고, 나무의 뿌리가 땅속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과 같이 그녀가 생존하는 것에 필수적인 욕망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연상의 여인 뮤를 만나며 나와 스미레의 일상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스미레는 인생 최초로 너무나도 격렬하고 아름다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녀가 뮤를 사랑하게 된 것에 그녀의 성별은 문제가 없었으며, 그녀의 사랑에도 그녀의 성별은 하등의 가치를 절삭하지 않았다. 그녀의 사랑은,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한) 이 소설의 첫 문단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이 특별한 것이었다.
"22세의 봄, 스미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드넓은 평원을 곧장 달려가는 회오리바람 같은 격렬한 사랑이었다. 그것은 지나는 길에 있는 모든 존재를 남김없이 쓰러뜨렸고, 하늘 높이 감아올려 철저히 두들겨 부수었다. 그리고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바다를 건너 앙코르와트를 무자비하게 붕괴시키고 한 떼의 불쌍한 호랑이들을 포함한 인도의 숲을 뜨거운 열로 태워버렸으며, 페르시아 사막의 모래바람이 되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성으로 이루어진 어떤 도시를 통째로 모래로 묻어 버렸다. 멋지고 기념비적인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는 스미레보다 17년 연상으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여성이었다. 그것이 모든 사건이 시작된 장소이고 모든 사건이 끝난 장소였다."
스미레는 뮤에게 격렬한 사랑을 느끼는 동시에 알 수 없는 본인의 성욕까지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뮤는 14년 전 어떤 기묘한 일을 겪은 뒤로 사랑과 성욕에 대한 모든 감정들을 박탈당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성욕을 느끼지 않는 종류의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나와 스미레와 뮤 사이에는 단순한 삼각관계라고 할 수 없는 묘하고 중의적인 화살표들이 서로 어긋나고 있는 셈이다. 이 어긋난 감정의 파편들이 소설을 이끈다. 앞서 말한 스푸트니크, 그 외롭고 처연한 차가운 쇳덩이가 이 소설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이유는 이와 같다. 우리가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스미레의 문장이 그들의 관계를 적절히 드러낸다. 우리는 모두 다른 궤도를 따라 항해하는 외롭고 고독한 선장들이다.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우주로 쏘아 올려진 라이카와 같다. 우리는 선원이 없는 작은 쇳덩이의 고독한 표류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므로 화자의 말과 같이 우리는 먼 바다에 흘러들어가 하나가 되는 강의 하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고독하다.
2.
이 소설은 전형적인 하루키식 이원론적 세계관이 드러난다. 내가 읽은 바로는(그리고 기억하는 바로는), 노르웨이의 숲 이외에 정확한 리얼리즘 소설을 하루키가 쓴 적은 없는 것 같다. 거의 모든 소설에서 하루키는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양분하는 이원론적 세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그 이야기의 대부분에서 주인공은 어떤 곳에 고립되는 일련의 사건을 겪고 두 개의 세계를 감지하게 된다. 그리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본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성분이 너무나 순식간에 교체된 것을 이해한다. 그 사건 이전과 이후의 인물은 전혀 다른 인물이 되는 것이다. '양을 쫓는 모험'이나 '1Q84'와 같이 이곳이 아닌 저곳의 세계가 직접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소설 속의 주요 무대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신비적인 관점에서의 저 세계로 묘사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소설의 저 세계는 후자다. 저 세계의 모습이나 그곳으로 사라져 버린 무언가를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렴풋이 감지할 뿐, 그곳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거나 통행할 수는 없다.
이 소설 속 저 세계는 여러 부분에서 주인공들의 결정적 순간들을 낚아챈다. 스미레가 어릴 적 키웠던 고양이가 사라져 버린 소나무라던지, 뮤가 기이한 사건을 겪었던 스위스 어느 마을의 관람차 안이라던지, 비현실적인 음악의 출처를 찾아 쫓아가던 화자가 겪었던 순간의 세계 같은 것들이 저 세계의 알 수 없는 정체를 조용히 암시한다. 그 세계는 달이나 거울과 같은 것들로 묘사되지만, 무엇도 그것을 정확하게 나타내지는 못한다. 다만 그것은 우리들이 삶의 시간을 주워 담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상실의 순간들과 관련되어있다. 하루키에 의하면 우리가 상실한 것들은 저 세계로 보내지게 되며, 우리는 그 순간 더 이상 이 전의 자기와는 같지 않은 다른 자기가 된다. 뮤가 자신의 성욕과 배란과 생리와 사랑과 삶에의 의지를 저 세계로 보내버리는 순간이라던지, 스미레가 뮤를 향한 강렬한 욕구를 저버리지 못하고 그녀에게 구애하지만 실패한 뒤 육체까지 홀연히 사라지는 과정 같은 것들이 그렇다. 다만 화자는 스미레를 찾는 과정에 그 세계의 문턱에 발을 딛을 뿐이다. 화자는 특유의 침착성을 발휘해 의식을 집중하여 자신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화자 역시 결국 그리스에서 겪은 일련의 일들로 인해 자신의 무엇인가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섬을 빠져나오는 배 안에서 인식한다. 그에게서 스미레라는 존재가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그녀의 부재로 인해 자신의 무엇인가가 영영 저 세계로 가버렸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돌아온 자신의 장소에서 자신의 제자와 제자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그 역시 이전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3.
이 소설은 결국 상실과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좀 썡뚱맞을 수 있는데, 연인의 의미가 결국 그렇다. 그리워하는 사람. 이 두 가지는 나의 인생에서도 내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주제였다.
나는 내가 갖는 결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어느 순간 성년이 된 후로부터, 나는 내가 무언가가 결여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 전체에 걸쳐 찾았으며, 결국 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것을 설명하자는 것은 아니고, 나는 누구에게나 그런 결핍과 상실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게 존재하는 결핍과 내가 겪은 상실에 인과관계가 있을까? 각자의 독립된 사건들에 인과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는 것이 인생을 산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겪은 상실의 순간들이 내 존재를 결정하는 주요한 사건들이었다는 사실이 이젠 조금씩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상실의 대상들은 동시에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저 세계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 역시 이제는 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이다. 나는 2012년의 초여름이 미치도록 그립다. 그때 보았던 모든 것들과 들었던 소리들과 잡았던 감촉들과 맛봤던 음식들과 마셨던 맥주들 나눴던 대화들을 몽땅 온전히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순간을 다시 겪고 싶다. 모든 것을 제외한 하나를 원하던 그때의 그 마음과, 그 아름다웠던 밤들과, 내가 도달한 그 정상에서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다시 재생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자리에 박제되어 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은 이제 저 세계로 가벼렸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립다고 이야기하는 모든 대상들은 영원히 그리울 것들에 불과하다. 나는 그때와 같은 격렬한 더위를 매년 여름이면 다시 느끼고, 원한다면 그 장소에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으며, 내가 그때 사랑했던 누군가는 아직도 이 세계 어딘가에서 다른 순간에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같은 계절에 같은 장소를 같은 동행인과 같이 찾는다 한들, 그것들은 모두 저 세계로 떠나버린 모든 허깨비의 허상과 같다. 나는 그 사실을 지난겨울에 너무나 깊게 알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던 대상은 더 이상 이 세계에 없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워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히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 역시도 그때 이후로 껍데기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4.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여전히 자신이 딛은 세계를 건강하게 살아간다. 무언가 결여된 인간들이 세계 어딘가를 걸어 다닌다는 사실은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그때와 다른 인간이 되었지만 그 인간으로서의 삶 역시 살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과 다른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한 화자는 자신의 불륜 생활을 정리한다. 뮤는 더 이상 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꺼내놓고 살아간다. 그리고 스미레는...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한 전화에 화자는 안도한다. 스미레는 '나야, 돌아왔어'라고 너무나 일상적인 어휘로 자신의 상황을 전한다. 이것은 꿈인가. 화자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나야, 돌아왔어'라고 말한다는 것. 그것으로 소설은 정리된다.
내게도 그런 전화가 왔었다. 너무도 태연하게, 일상적인 어휘로, 비가 와서 내 생각이 났었다고 말했었나. 그것은 꿈이었나. 내가 그리워한 모든 것은 그 세계에 묶여있다. 나는 영원히 그곳에 가 닿을 수 없다. 그 사실을 문득 되새길 때면 나는 모든 강물이 흘러들어 하나로 합쳐 드는 바다의 경계에 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독하다. 내가 이 소설을 몇 번씩 읽는 이유는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