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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Oct 24. 2015

적어도 이십육만 번은 이 유적을 적셨을 그 빛

150604(4) : 캄보디아 씨엠립, 앙코르왓의 석양

 벽화들이 그려진 회랑을 지나 서문 쪽으로 나왔다. 기울어가는 해가 우리의 정면에 있었다. 일몰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유적 여기저기에 걸터앉아 석양을 보고 있었다. 우린 더 나가 해자 근처에서 일몰을 보기로 했다. 


 문 밖으로 나가 해자 앞에  걸터앉으니, 너른 해자에 붉은 해가 비스듬히 쏟아져 눈이 부셨다. 우린 가만히 해가 더 지길 기다렸다. 앙코르왓이라는 곳이 한순간 너무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바로 내 등 뒤에 있지만, 영화에서 카메라의 기법으로 피사체와 배경이 갑자기 멀어지는 장면처럼 그 찬란한 유적이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오래된 돌더미들이 멀어지고, 옆에 앉아있는 득도 멀어지고, 주변의 사람들도, 내가 앉은 돌덩이도 저 멀리 사라지고 나자 내 눈앞에서 빛나는 태양과 나만 남은 것 같았고, 그 사이가 왠지 가깝게 느껴졌다. 


 태양은 파란 하늘에 붉은 눈동자처럼 번뜩였다가, 구름에 가리면 구름의 휘형한 빛처럼 반짝이거나 날카로운 창처럼 쏟아지거나 했다. 앙코르왓에 마지막으로 돌을 올려놓은 인부를 또 떠올렸다. 모든 사위가 멀어져가고 태양과 나뿐인 세상에서 한 인부가 조용히 조각된 마지막 돌덩이를 탑의 꼭대기에 쌓았다. 그 순간 그 인부는 앙코르왓을 만들었다. 거짓말 같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리고 같은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거짓말 같지만, 그렇게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다시 순식간에 사위가 가까이 돌아오고, 태양이 마지막으로 강렬한 불빛을 뿜어내며 하늘을 영롱한 색으로 적셨다. 칠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적어도 이십육만 번은 이 유적을 적셨을 그 빛이 나를 적셨다. 앙코르왓의 해가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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