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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Sep 16. 2016

'크로니클'을 보고

어두운 청춘이 발산하는 슬픈 에너지

 판타스틱4를 리부트 하고 욕을 얻어먹을 대로 얻어먹은 조쉬 트랭크가 그 영화에 캐스팅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 영화를 연출했다는 거라길래 찾아봤다. 이 영화를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간다. 점점 포화되어가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대해 갖고 있는 제작사들의 기대와, 비교적 싸게 먹히는 인지도 없는 한 재기 발랄한 영화감독의 만남 속에서 감독이 얼마나 답답했을지. 적어도 조쉬 트랭크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자신만의 색깔과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인정받아 마땅하다.


 앤드류와 맷, 스티브는 어느 날 밤, 한 동굴에서 겪은 기이한 일 이후 일종의 초능력이 생긴다. 처음 초능력이 발현되었을 때 이 평범한 고교생들이 보인 반응은 '씨발 죽인다!!' 정도였다. 그 후 그들은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캠코더로 기록하기로 하고, 이것이 영화의 기본 서사가 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독특하다고 할만한 연출력, 그리고 다른 하나는 히어로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전자는 앞에서 말한 서사를 이끄는 과정에 있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내내 들고 다니는 캠코더에서 기록된 영상들, 그리고 종종 타인들에 의해 촬영된 영상들이 절묘하게 교차되어 보여지며 진행된다. 그러니까, 그 외의 제3의 벽 바깥의 전지적인 시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온전히 서사 내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시야에서만 영화가 진행되므로, 이 영화는 분명 픽션임에도 일반적인 영화와는 달리 상당히 논픽션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에서도 비슷한 장치가 사용되었는데(이런 기법을 파운드 푸티지라고 한단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에서 아쉬웠던 것이 영화적 카메라 무빙의 부재였다면 이 영화에서는 그것을 '초능력'설정 하나로 손쉽게 해결한다. 캠코더를 손에 들고 촬영한다던지, 차량의 블랙박스 영상이나 건물의 CCTV 영상을 보여주는 방법은 꽤나 현실적인 설득력을 가져오는 대신 밋밋하며 어지럽고 영화적 매력을 어필하기 어려운 단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카메라를 초능력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설정을 통해 이런 단점을 극복한다. 혼자서 1인칭의 인터뷰 장면을 진행한다던지, 카메라가 드론에 장착되어 날아다니는 등 주인공의 손 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카메라 무빙을 설정 파괴 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이런 자연스러운 연출 속에 영화는 '리얼리티'와 '영화적 재미'를 동시에 얻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이러한 연출의 독특함 외에도 이야기의 재미까지 효과적으로 얻어냈다. 전형적인 히어로물에서 보이는 권선징악 이라던지, 상승과 추락의 구조 등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히어로물의 구조는 어처구니없이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다. 한 인물이 특별한 힘을 얻는다, 힘을 얻은 그는 힘의 올바른 사용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그 가운데 자신의 소중한 무엇을 위협하는 빌런이 나타나며, 소중한 무엇인가를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해 빌런을 무찌른다, 그리고 대충 해피엔딩, 뭐 이 정도다. 여기서 이 영화는 소년들이 힘을 얻는다, 까지만 이런 서사를 따라가다가 이후 노선을 급 변경한다. 소년들에게 얻어진 힘에 대한 고민 따위는 없다. 힘의 올바른 사용법, 그것들은 알바 아니다. 아이들은 레고를 맞추거나 과자를 손대지 않고 입에 털어 넣는 것 따위에 힘을 사용한다. 힘이 강력해지자 소년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거나 캐치볼을 한다. 종종 공공장소에서 타인들을 놀려먹는 데에도 힘을 사용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그저 낄낄댄다. 10대 소년에게 슈퍼파워란 그 정도의 의미이지 않을까? 남들을 크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의 재미를 위해 장난을 치거나, 놀이를 하거나, 뭐 그런 것. 그들에게 선과 악이라던지, 정의라던지, 윤리 같은 것들은 의미가 없다. 적어도 그들 스스로에게 그런 단어들이 직접적으로 닥쳐오기 전까지는. 

 그래서 이 영화의 이야기에는 빌런이 없다. 명확한 악당이 등장하는 대신, 힘을 얻은 소년들의 상황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들의 흔들리는 정체성과,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소년들의 아주 사적이고 내밀한 무언가가 그들을 움직인다. 예컨대 아픈 어머니와 폭력적인 아버지라던지, 첫 경험의 순간에 토악질을 하는 최악의 경험이라던지, 그런 것들이 이야기를 극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흔히 사람들이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에 기대하는 통쾌한 무언가가 없다. 영화가 끝난 뒤에 남는 것들은 '애잔함' '씁쓸함'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영화가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다. 히어로물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 얻을 수 있는 영화적 매력과 이야기의 매력을 최대화했으므로. 사실 이 영화는 슈퍼파워에 대한 이야기이기보다는 어두운 청춘이 발산하는 슬픈 에너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뜻밖이다. 사실 그렇게 이야기가 정리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납득이 간다. 마지막에 보여지는 그 캐릭터만큼 진실된 캐릭터는 이 영화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롭지만 어리숙하고, 감정적이지만 시종일관 중재자의 역할을 하려고 하며, 어중간한 능력이지만 최후에 사건을 종결짓는다. 게다가 마지막엔 뜬금없이 고백을 한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너를 위해 이곳에 왔노라고. 나는 이 과정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면 더 훌륭한 영화가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내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부분들이 어떻게든 변하게 되겠지? 그래서 여기서 만족한다.


 아무튼 이 영화를 보게 되니 더욱 20세기 폭스사가 원망스럽다.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감독의 재량권을 적절하게 보장해주지 못했다고 하던데, 그래서 조쉬 트랭크가 언론에 보도된 기행들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아쉬운 부분이다. 판타스틱4를 보며 머릿속에 물음표밖에 찍히지 않았다. 같은 감독이 만든 영화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음, 이 얘기는 이제 그만. 그만큼 이 영화가 좋았다는 뜻이다. 



+ 데인드한이 이 영화 이후 왜 그렇게 주목받았는지 알겠다. 그만큼 10대의 어두운 에너지를 미워할 수 없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그의 웃는 얼굴, 처연한 얼굴, 분노에 찬 얼굴 모두에 하나의 교집합이 있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결국 청춘 따위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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