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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Sep 16. 2016

'본 투 비 블루'를 보고

'인생의 무엇'이 아닌 '무엇의 인생'

1. 인생의 무엇


 내게는 인생의 장면들이 있다. 그리고 그 장면에는 항상 어느 음악이나 영화가 함께 했다. 따라서 나는 어느 영화나 음악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 영화나 음악을 보고 듣던 때의 내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 영화나 음악들을 인생의 영화, 인생의 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아, 물론 책도.


 인생의 음악이라 한다면, 여러 장면들이 떠오른다. 언니네 이발관 5집 만을 주구장창 들으며 누워있던 세부의 어느 밤, 그 해변의 모습이라던지, 정전된 방 안에 앉아 촛불을 켜고 싸구려 사과와인을 마시며 듣던 Beyond the Missouri sky라던지, 좋아하는 여자를 기다리며 카페의 바 안에 앉아 듣던 The melody at night, with you 같은 앨범들. 그리고 가장 최근, 그러니까 지난겨울 내내 들었던 Chet Baker Sings까지. 나는 그 앨범의 2번 트랙인 Time After Time을 올해의 겨울 노래로 정하곤 그 겨울의 눈송이가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릴 만큼 작아질 때까지 들었다. 


 인생의 장면들에는 각자 사건들이 있었고, 그 사건들 속에서 들은 음악들은 퍽 어울리는 주제곡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연수가 말했듯이, 어느 순간 내 인생이 모두 거짓이라는 섬뜩한 생각이 들 때 그 순간의 음악들을 떠올린다면 안심할 수 있다. 그 음악을 듣던 나는 다른 누가 될 수 없는 온전한 나였으니까. 그 사실만은 믿어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종종 그 음악들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굉장한 무력감이 들 때, 내 삶에 회의감이 회오리처럼 몰아칠 때면 그 음악들을 꺼내 듣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은 살아진다.



2. 무엇의 인생


 그런데 이 영화에는 나와 정 반대의 사람이 등장한다. 내가 음악으로서 삶을 기억한다면 그는 음악과 삶을 동시에 산다. 내가 기억하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면 그는 살기 위해 음악을 한다. 이 차이는 정말이지 엄청난 차이다. 비유하자면 추워서 불가에 앉은 산짐승과 그 불 속의 불타는 장작더미만큼 다르달까. 삶을 연소시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는 그에 대한 영화다. 


 영화의 쳇은 이미 전성기를 지난 뒤, 마약으로 추락한 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감옥에서 출소한 뒤 재기를 꿈꾸며 자신의 자전적 영화를 촬영하는 장면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되는데, 이 설정에서 시작된 연출이 퍽 맘에 든다. 영화 속의 영화는 쳇이 약값을 못 받은 빚쟁이들에게 폭행당해 재기불능의 상태로 추락하며 제작이 엎어진다. 하지만 그 미완의 영화는 계속해서 영화 속의 플래시백으로 나타난다. 흑백의 플래시백 장면들은 적절한 순간마다 등장해 쳇의 내면을 더욱 깊숙하게 비춰준다. 


 이 플래시백 장면들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처럼 보인다. 이 흑백의 장면들은 쳇에게 가장 전성기의 모습들이지만 미완의 이야기이며, 쳇의 새로운 연인인 제인이 그 이전 연인들의 역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망령들이 등장하는 흑백의 필름과 재기를 꿈꾸며 노력하는 현재의 쳇이 교차되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쳇을 통해 감독이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쳇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가 그토록 얻고 싶어 했던 것은 무엇인가. 쳇에게는 사랑이나 명예나 출세 같은 것은 의미가 없다. 그에게 의미를 주는 유일한 것, 그것은 그가 그토록 얻고 싶었던 절정에 이르는 음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쳇은 계속해서 모순적인 행동을 반복한다. 사랑하는 연인 제인의 부모를 만나 결혼을 허락받으려는 자리에서 제인의 아버지에게 Fuck you라고 하질 않나, 그토록 원해서 얻게 된 버드랜드의 무대 뒤편에서 '경력 따위 필요 없어요! 난 연주가 하고 싶어요, 그게 전부라고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그 모순된 선택의 마지막을 보여준다. 



3. 가장 잔인한 것 


 영화의 꾸준한 설득 끝에,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모두 그의 선택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가 조용히 사랑의 노래를 읊조리는 동안, 무대의 청중들은 그에게 깊이 빠져든다. 뒤늦게 도착한 그의 연인 제인은 그가 꿈꾸던 재기에 성공한 모습을 본다. 그리고 듣는다. 그가 자신을 처음 유혹할 때, 볼링장 소파에 앉아 속삭이던 그 노랫말을. 여기서 그 객석의 모든 청중들 가운데 쳇의 본질을 바라본 사람은 제인밖에 없다. 그 마일스마저 박수를 치게 만든 그 무대 위에 선 쳇의 모습을 본 제인은 눈물을 흘리다 그가 준 목걸이를 넘기곤 사라진다. 쳇은 그 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좇는다. 연주하는 트럼펫을 입에서 떼지 않은 채로. 


 그의 선택을 의미 있다 말할 순 없다. 그것은 그저 그의 선택일 뿐이며, 그를 가장 잘 나타내는 메타포일 뿐이다. 그에게 윤리나 목적이나 희망 따위는 없이 오직 음악만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이 그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관객들은 쉽사리 마음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 음악이 흘러가는 동안, 관객들은 나처럼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 에단호크의 연기는 놀랍다. 그는 발성과 동작까지 섬세하게 교정하여 쳇의 모습을 재현해낸다. 하지만 다만 재현에 그치지 않고 그의 내면을 깊이 있게 투영하려 노력한다. 마지막에 부른 I've never been love before가 그의 목소리인지, 쳇의 목소리인지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실제로 에단호크는 이 영화를 위해 1년간 성악과 트럼펫을 공부했다고 한다)

++ 영화 자체로도 의미 있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쳇의 음악들, 그의 목소리들이 영화를 더욱 아련한 분위기로 몰아간다. 게다가 그 수많은, 그 아름다운 장면들까지. 바다에서, 산에서, 농장에서, 지붕 위에서, 차 위에서, 그 어느 곳에서건 트럼펫을 놓지 않고 자신이 열망하는 음악에 가 닿으려는 그의 모습들은 시적으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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