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슬픔을 감내하는 방식
1. 초코와 선생님
내가 인생에서 죽음을 맞닥뜨린 최초의 경험은 어느 날 누나가 집에 데려온 초코라는 토끼의 돌연사였다. 꽤나 귀여움을 받으며 집 안에서 잘 자라던 토끼가 샤워 후 갑자기 죽어버린 그때의 기억은 눈물범벅의 내 얼굴로 떠오른다. 교회에 가는 차 안에서 딱딱해져 가는 토끼의 몸을 쓰다듬으며 펑펑 울었다. 토끼는 귀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므로 샤워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는 그 죽음이 내 탓인 것 같아서 더욱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 뒤로도 나는 죽음 앞에 눈물을 많이도 흘렸다. 시골에서 나와 함께 자란 흰둥이라는 강아지가 옆집 개에게 물려 죽었다는 할머니의 전화를 받은 날도 엄청 울었다. 그러다 중학생이 된 어느 날, 내게 조건 없는 사랑을 부모님 외에 처음 느끼게 해 주셨던 초등학교 은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동급생보다 어리고 몸이 작았던 나를 깊은 관심과 보살핌으로 항상 챙겨주셨던 선생님은 당신의 투병생활 끝자락에 성장한 내 모습이 보고 싶어 전학 갔다는 초등학교를 직접 찾아가셨다고 했다. 하지만 난 당시 중학생이었으므로, 그 초등학교에 내가 있을 수는 없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셨는데도 찾아간 학교에서 그 학생은 졸업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돌아간 선생님은, 곧 소천하셨다. 사모님께서는 선생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지갑에서 나온 내 사진을 보고는 연락처를 찾아 내 어머니에게 연락을 주셨다. 어머니에게 그 소식을 들은 그 날은, 내가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운 날이었다. 나는 아직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는 늘 선생님의 성함을 말한다. 세계를 구한 영웅이나 희대의 천재들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죄책감도 많이 느꼈다. 하필 투병 중인 노구를 이끌고 나를 찾으셔서 건강이 악화되셨던 것은 아닌가, 왜 나는 그동안 선생님을 찾아뵙지 않았는가, 사실은 별 상관없었을 수도 있는 일들로 나는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어지간해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타인 앞에서도 혼자서도 절대 울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종종 꿈에서는 정신이 빠질 듯이 울 때가 있다. 그런 꿈은 비정기적이지만 수시로 내게 찾아온다.
2. 그 이후
젊은 나이에 오래도록 항암치료를 받아온 사촌누나가 내가 군생활을 하던 시절 하늘로 갔다. 역시 군생활의 말년, 편찮으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얼마 전에는 대학시절 친구의 부친상에 다녀왔다. 성년이 된 뒤에 죽음은 도처에 널려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어떻게든 자신의 방법으로 받아들인다. 장례식장에서 친구는 마치 오랜만에 만난 사석에서처럼 근황을 얘기하며 종종 웃었다. 그와 더 친했던 다른 친구는 타박하는 류의 농담을 던지며 비일상 속에서 일상을 들춰냈다. 나도 나와 더욱 가까웠던 사람들의 장례식에서 종종 웃기도 했고, 의연했다. 하지만 주변을 보면 나와 같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누나는 할아버지 지갑 속에서 나온 자신의 사진을 보며 펑펑 눈물을 흘렸고, 사촌누나의 죽음 뒤의 이모네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삶은 살아진다.
3. 걸어도 걸어도
영화의 시작은 요리하는 모자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의미가 깊다. 보통 가족의 의미는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식구가 그런 단어다. 일본어에서도 한자로 입구자를 쓰고 구치라고 읽으면 우리의 식구라는 의미와 대충 상통하는 단어가 된다. 요리하는 모습은, 그리고 그 요리들을 단란하게 앉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연스레 행복한 한 가정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결국 이 영화는 가족영화다. 은퇴한 부모의 집에 어느 특별한 날을 맞아 가족들이 모인다. 철없어 보이는 딸 부부와 아이들은 조용한 고택에 활기를 불어넣고, 막 결혼한 아들 부부네는 자연스럽게 가족들의 이야기꽃의 주제가 된다. 일상의 장면들이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며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장면들에 종종 균열이 발생한다. 아주 미세한 균열에 관객은 이 집안에 어떤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되고, 미묘한 대사들만으로 감독은 그 사건을 마땅한 플래시백 없이 관객에게 설명한다. 곧 관객은 이 평범한 하루에 숨겨진 어떤 비일상의 내막을 모두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루는 아주 평범하게 흘러간다. 남편의 어릴 적 사진을 살펴보고, 가족들의 예전 추억을 들추며 즐거워한다. 함께 사진을 찍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분명 비극이었을 십여 년 전 그 날의 일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그들은 아무렇지 않을까. 그들의 일상은 이미 그 사건과 그 슬픔을 묻어둘 만큼 굳은살이 두껍게 박여 움직이는가. 겉보기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이 집에 한 남자가 찾아오며 사실 감당할 수 없던 그 슬픔의 크기가 드러난다. 감정표현과 대화법에 내내 서투른 아버지가 '저따위 녀석 때문에 준페이가!'라고 외치는 장면은 오갈 데 없이 처연하며, 과거 남편의 불륜도 농담처럼 얘기할 만큼 단단해 보였던 어머니가 '그래서 부르는 거야'라고 덤덤히 말할 때의 슬픔과 분노는 여과 없이 관객에게 직진한다.
일상이 흔들리는 결정적인 장면은 밤에 찾아온다. 느닷없이 열린 문틈으로 날아든 나비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준페이의 이름을 부른다. 준페이가 틀림없어, 이리 오렴 준페이. 칼 융은 인과관계없는 두 사건이 우연히도 의미의 연결고리를 발생시키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싱크로니시티'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우연적인 사건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를 구체적이고 필연적인 현상으로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치 '저 노랑나비는 말이지, 겨울이 되어도 안 죽은 하얀 나비가 이듬해 노랑나비가 되어 나타난 거래'라는 문장과 '준페이의 기일, 밤 중 느닷없이 나비가 준페이의 위패 근처에 날아들었다'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과 같다. 둘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으나 어머니는 둘 사이에 고리를 만들어 붙임으로써 의미를 만든다. 비록 융은 싱크로니시티의 개념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우리에겐 많은 위로가 된다.
4. 그러니까
사람들 마다 슬픔을 감내하는 방식은 다르다. 내가 울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내 곁을 떠나간 사람들의 흔적은 내게도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 가족은 12월이면 함께 모여 할아버지를 추억한다. 기독교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할아버지와 있었던 사연을 하나 둘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가족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시고, 나는 새로운 할아버지의 모습을 듣는다. 그 모습은 퍽 정겹다. 그리고 나는 사촌누나가 자신의 투병생활을 그린 만화책을 종종 읽는다. 내가 볼 수 없었던 누나의 여린 모습, 씩씩한 모습, 낭만적인 모습들이 그 책에 있다. 그 책을 읽으며 나는 그리 못나지 않은 모습으로 슬퍼한다.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삶은 닥쳐오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슬퍼하고 버텨내고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삶이 이어지는 모습은 아이를 통해 나타난다. 무뚝뚝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들어간 방에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아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언젠가 저 녀석을 데리고 축구장에나 가자'라고 말한다. 아이는 '아빠처럼 조율사, 그게 아니라면 의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감독이 설명하는 삶의 방식은 이런 것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잊혀질 수 없는 흔적으로 남지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으며 새로운 세대는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그들을 추억하며 성장한다는 이야기.
극의 마지막에서 료타의 가족은 어머니와 걸었던 길을 함께 걷는다. 그곳엔 새로운 아이도 보인다. 료타는 아이에게 노랑나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가 '어디서 들었어?'라고 묻자, '글쎄, 누구였지?'라고 대답한다. 나는 이 결말이 참 마음에 든다.
+ 키키 키린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이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보여주었던 연기와 비슷한데, 더욱 깊고 섬세하다.
++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는가에 대한 부부의 대화가 재미있다. 배꼽을 통해 서서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보여준 가족관이 여기서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