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병적인 공허와 슬픔과 극복할 수 없는 상처
1. 심심함과 외로움
이 영화에는 성적 쾌락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한 남자가 나온다. 겉보기엔 멋지고 스타일리시한 도시남으로 보이는 이 남성은 직장과 집, 업무 중일 때와 샤워 중일 때를 막론하고 시시 때때로 자위를 하며, 상황이 맞으면 언제든 여자를 사서 성적 욕구를 해소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남자 도대체 왜 이럴까'
이 남자는 외로운 걸까. 분명 보기에 현재 진행형인 연애 상대는 없는 것 같다. 직장 동료와의 모임이 종종 있지만 그 모임을 이 남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외로운 게 맞을까. 소설 7번 국도에는 재현이라는 남자가 나온다. 재현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에게 심심함과 외로움의 차이를 설명한다. 자신은 어렸을 때 자기가 외로운 줄도 모르고 걸핏하면 심심하다고 떠들어댔었는데, 그의 심심함을 잊게 해줄 취미, 혹은 목표가 생겼음에도 그 심심한 감정은 사라지질 않더라고. 그래서 그때 나는 심심한 게 아니라 외로웠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럼 이 남자는 외로운 걸까?
2. 욕망과 허망
외로운 것 같지도 않다. 외롭다는 감정은 무언가의 부재를 의미한다. 특히 사물이나 감정, 기억 따위가 아니라 특정 인물의 부재를 뜻한다. 7번 국도의 재현이 서연을 사랑하게 된 뒤로, 그리고 헤어진 뒤에야 기타를 치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알게 된 것처럼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내 옆에 없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외로움은 곧 갈증으로 연결된다. 새로운 사랑에 대한 갈증, 욕망, 나의 외로움을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줄 어떤 존재를 찾는다.
하지만 영화 속 남자에게 그런 존재는 표현되지 않는다. 남자는 오직 쾌락에 대한 열망만이 가득할 뿐, 어떤 사람에 대한 그리움, 어떤 상태에 대한 회귀의 욕구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상태에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 사람을 외롭다 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남자는 집에서 노트북의 야동을 보며 자위하고, 회사의 화장실에서 자위하고, 종종 눈이 맞은 여자와 원나잇을 하거나 돈 주고 산 여자와 자는 자신의 생활에 불만이 없어 보인다. 그는 다른 누군가를 성적 목적 외의 다른 목적을 갖고 만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남자의 결핍은 무엇인가.
3. 균열
그런 남자의 일상에 그의 동생이 갑작스레 등장한다. 정황상 그동안 연락을 끊었던 것으로 보이는 여동생은 어느 날 그의 집에 무단으로 들어와 동거를 요청한다. 남자는 동생이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이 동의한다. 그녀로 인해 그의 일상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여자는 그와는 정반대의 사람이다. 그녀의 결핍은 너무도 쉽게 관찰된다. 그녀는 외로운 사람이고, 항상 외로운 상태에 놓인 사람이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자신을 사랑해줄 연인을 찾는다. 때문에 쉽게 사랑에 빠지고 쉽게 몸과 마음을 내어준다. 이 말은 쉽게 버림받고 쉽게 상처받는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항상 불안하고 항상 외로울 수밖에(영화 속에서 그녀 역시 재현처럼 자신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심심했었나 보더라고 말한다).
그녀와의 동거부터 그 역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자신의 회사 동료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때쯤, 회사 동료와 진지한 만남을 생각한다. 대화 없이 돈을 쥐어주고 섹스하고, 바에서 눈이 맞아 굴다리 밑에서 바지만을 벗은 채 섹스하던 때와는 다르게 그는 회사 동료와 함께 길을 걷고, 수다를 떨고, 식당에서 멋진 저녁을 먹는다. 그때의 그는 자신의 병적인 욕구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하지만 동료와의 첫 관계에서 그는 실패한다. 동생과는 다툰다. 너는 내게 방해가 될 뿐이라고, 나는 너를 책임질 이유가 없다고 쏘아붙인다. 그에게 문제는 도대체 무얼까.
4. 감각과 상처
동생과 다툰 뒤, 그는 극단적으로 다시 쾌락을 좇는다. 바에서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를 유혹하다 맞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밤새 쾌락의 시간을 보낸다. 와중 그녀의 부재중 메시지가 울린다. 무시하고 밤을 지새운 뒤 돌아간 집에는 심심함을 이기지 못한 동생이 앉아있다.
그와 그녀가 겪은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되진 않는다. 다만 나는 가족관계에서의 어떤 결핍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구체적 사건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의문이었던, '이 남자 도대체 왜 이래?'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의 동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상태가 중요하다. 그는 이미 너무나도 크게 어긋났으며, 그의 동생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겪은 상처에서 그와 그녀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서로 등을 댄 채 서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뒤틀려 버렸다.
영화는 동기에 집중하지 않는 만큼이나 그들의 미래 역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꽤나 마음에 들지만, 영화에서 그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요컨대 갈등은 있지만 해소는 없고, 추락은 있지만 상승은 없는 이야기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구원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는 영화의 초반에서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 같은 인물과 같은 장소, 같은 사건이 벌어지지만 남자는 혼란스러워한다. 그의 선택을 보여주지 않고 영화는 끝난다.
+ 영화의 첫 장면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동정과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씨시가 사랑스러워 보이던 순간의 이질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 마이클 패스벤더의 섹시함만으로 그의 연기를 설명할 수 없다. 한 남자의 병적인 공허와 슬픔과 극복할 수 없는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배우는 몇 없을 것이다. 패스벤더는 그 몇 중 하나가 분명하다. 그의 깊은 눈은 섞일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을 한 번에 설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