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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Sep 16. 2016

'터널'을 보고

그들 위에서 동작하는 비정상의 시스템

1. 어쩔 수 없이


 2014년의 4월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를 그 사건과 연결 지어 감상할 것이다. 그리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쩔 수 없이 누군가는 분노할 것이고, 누군가는 슬퍼할 것이고, 그리고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이다. 이것은 절대 우연히 그날의 사건, 그리고 그 후의 일들과 이 영화의 장면들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영화 밖의 기억으로 인해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불편하다면 그것은 다분히 감독의 의도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만일 제대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영화관 밖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감독의 몫도 아니며, 여기에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나의 역할도 아니다. 그것이 누구의 책임일지는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굳이 영화의 감상에 이런 글을 적는 것이 그동안 내가 영화에 취해왔던 입장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봤지만, 정성일 아저씨는 말했다. 영화관 밖에서 영화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진정 의미 있는 일이라고. 



2. 절망과 익살


 하지만 영화 밖의 이야기는 이미 영화의 영역을 벗어난 이야기이므로, 여기선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하기로 하자. 영화는 '한국의' 평범한 젊은 가장 정수로부터 시작한다('한국의'라는 수사가 엄청나게 중요한 영화다). 정수는 차를 타고 등장한다. 차에서 부인 세현과 통화를 하고 있는데, 어깨와 턱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놓고 통화하는 폼이 어째 불안하다 싶었건만, 완공되지 얼마 안 된 하도 터널을 지나다가 갑자기 무너진 터널에 갇히고 만다. 정신 차린 뒤 정수의 처지는 비관적이지만, 다행히 핸드폰이 무사히 동작하여 긴급신고를 할 수 있었다. 그의 고립 사실을 알게 된 대한민국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나서고, 한국의 모든 언론은 이에 집중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정수가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는 시점을 기준으로 전반과 후반 정도로 나눌 수 있겠다. 전반은 충분히 절망할 수 있는 가운데서 인간이 보여주는 긍정과 희망의 가능성을 적당한 유머와 함께 자연스레 보여준다. 절망과 어둠의 이미지 속에서 작은 랜턴을 손에 쥔 하정우는 특유의 익살스러운 생활연기로 슬프고 답답하고 어처구니없는 장면들 가운데 관객을 웃게 만든다.


 전반에선 큰 사건이 하나 지나가기도 한다. 인간의 이타성에 대한 윤리학적 실험실과 같은 이 사건은 정수의 이 고된 생존기에 극적인 전환점이 된다. 이 사건을 통해 정수는 상실을 경험하지만, 1인극의 필연적인 한계점을 극복할 윤활유 같은 존재와 동행하게 된다. 이 존재는 정수의 심리를 외부로 끌어내어 극의 부피를 확장할 뿐만 아니라 주요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며, 극한의 고독과 절망 속에 놓인 정수의 위태위태한 정신상태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게 만든다.



3. 핍진성


 이후의 과정은 지난하다. 보기에 괴롭고, 분노가 몰아친다. 이전까지도 마찬가지였던 답답함과 기막힘이 이곳에선 슬픔과 분노로 치환된다. 나는 영화를 보며 후반부가 훨씬 길었더라고 느꼈는데, 실제로 셈해보니 영화 전체에서 후반부가 차지하는 분량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좀 놀랐다. 이 과정을 통해 관객은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지점에서 영화 초반에 느꼈던 이상한 위화감을 한 번에 해소했다. 영화 초반에 나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심리상태가 약간 과장됐다고 느꼈는데, 그래서 영화적 연출로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소비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영화는 후반부를 통해 개연성과 핍진성을 동시에 획득한다.


 핍진성이란 픽션을 '세상에 진짜 있을법한 일'로 만드는 것이다. 김연수는 정말 완벽하게 핍진한 이야기는 알고 보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당연히 나는 여기서 고개를 끄덕인다. 정수가 긴급신고를 한 뒤부터 일어난 갖가지 쇼, 그가 지나던 터널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어처구니없는 이유, 그리고 이를 세상이 관찰하고 정치가 이용하며 벌어지는 수많은 폭력들까지. 영화는 효과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이 짧은 이야기에 담았다.



4. 아쉬움


 그리고 흥행할 영화의 지극히 당연한 과정들을 거치고 난 뒤, 정수는 구출된다. 이 과정에서 배두나의 연기와, 그녀가 뱉은 대사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이 과정 속에서 영화의 교훈 대부분이 터널 밖 배두나와 오달수를 통해 대사로 전달된다. 개인적 취향으로는 이 과정부터 통쾌함을 의도한 마지막 장면까지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정치인이 개소리를 지껄이는 장면의 직유는 어쩔 수 없이 싫지 않았다. 정수와 세현이 손을 꼭 잡은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긴장감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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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써놓고 보니 이건 영화 밖 이야기


 이 영화는 흥행 중이며, 아마 더 크게 흥행할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이 달갑다. 하지만 메시지를 잘못 읽지는 않았으면 한다. 주변인이 이 영화를 보고 '인간의 간사하고 나약하고 비열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봤다고 했는데, 음, 이기적인 모습까지는 동의하지만 간사하고 비열한 모습은 어디서 나왔는지 통 기억나질 않는다.


 굳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이 영화에 온전한 '악인'은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제 할 일들을 해오던 대로 해나갈 뿐이다. 우리는 그 모습에서 감동과 감사함을 느끼기도 하고(구조대장), 분노와 한심함을 느끼기도 하며(장관과 기자 등등),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지만(정수와 세현, 미나, 최반장의 어머니 등) 우리는 이들 중 진정한 악인은 없다고 가정해야 한다. 아마 악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은 분노를 유발하는 그들일 텐데, 사실 그들 대부분은 시스템 속의 충실한 행동자이자 관례와 관습의 적절한 학습자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분노를 이 부도덕한 사회 시스템과 이 시스템의 개선에 관심이 없는 책임자들의 무관심(을 당연하게 만드는 또 다른 시스템)에 돌려야 한다. 그들을 악하다고 아무리 비난해봤자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비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안전을 담보로 이득을 취하는 집단과 이를 묵인하는 권력, 그리고 인간으로 지녀야 할 최우선의 가치를 전도하는 이익집단들은 분명 비윤리적이다.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지 못하고 눈 앞의 특종에 눈이 멀어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은 악인이 아니다. 그들의 비윤리는 시스템이 이렇게 생겨먹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데스크의 지시를 받은 기자라고 했을 때 그들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사람들이 사진만을 보고 정치인의 행적을 판단하는 세상에서 정치인이 쇼맨십만을 발휘한다고 해서 그들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사 대충해도 이를 감시하는 시스템이 없는데, 그들이 경제논리를 초월해 아주 공정하게 공사하리라고 쉽사리 긍정할 수도 없다. 결국 악의 평범성 이야기네. 아무튼 그렇다.


 마지막에 와서 글이 길어졌는데, 어찌 됐건 우리는 아주 비정상적이고 허술한 사회 시스템 속에 종속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과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이제 그만해라'라고 말한다. 피로하다고, 지쳤다고, 작작하라고 말한다. 그 과반수가 넘는 평범한 인간들을 간사하고 비열하다 말할 것인가. 우리는 그들 위에서 동작하는 시스템을 비정상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손볼 수 있는 인간들을 향해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 이 과정은 누군가에게 아주 슬프고 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달걀보다 더한 것들로 뭇매를 맞아갈 테지만, 이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정의롭다. 여전히 응원한다. 누군가는 아주 불편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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