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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고래 Sep 16. 2016

'토니 타키타니'를 보고

사랑을 알게 되며 깨닫는 자신의 공허

1. 음악과 문장과 기억


 이 영화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이전에, 나는 다른 할 이야기들이 조금 더 있다. 하나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이다. 고2 때, 이 영화는 물론이고 무라카미 하루키나 류이치 사카모토도 잘 몰랐을 때, 나는 우연히 Solitude라는 곡을 들었다. 그리고 (심지어) 나는 이 곡 제목의 뜻이 고독함, 외로움, 뭐 그런 건지도 몰랐다. 그랬는데도 나는 이 단출하고 고요한 곡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참 좋아했었다. 마음을 어루만진다고나 할까. 


 오늘 어디서 읽은 글에 이런 표현이 있었다. 사람들은 음악에 담기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고. 약간 의역한 것인데, 이 말을 한 사람은 음악은 사람을 감싸는 존재라고 생각한 듯하다고 했다. 내가 고2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딱히 치명적인 사건이 있었던 게 아닌데도 그 이전과 이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밖에 몰랐던 내가 그때 즈음부터 라디오를 엄청나게 찾아들었고(신해철의 고스트네이션, 남궁연의 고릴라디오, 호란의 뮤직스트리트 등등), 책이라곤 마음을 열어주는 백한 가지 이야기 따위만 알던 내가 이상한 책들을 막 찾아 읽기 시작했다. 영화도 엄청 보고. 아무튼 이 이상한 시기에 나는 이런저런 음악들에 휩싸여 있었는데, 그중 나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던 음악 중 하나가 바로 Solitude 였다는 것, 그리고 이 처연하면서 날카로운 곡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토니 타키타니라는 영화의 거의 유일한 OST라는 것을 말해야겠다.


 그리고 나는 내 삶에 영향을 가장 크게 준 여성과 교류를 시작했다. 그녀를 통해서 나는 더 많고 다양한 세상의 단면들을 봤다. 그녀와 나는 책을 나누고, 음악을 나누고, 삶을 나눴다. 세상에 둘 밖에 없는 듯한 밤을 걸으며 수 없이 떠들고, 가끔 멀리 떨어졌을 때면 전화기를 붙잡고 네 시간 다섯 시간을 통화했다. 그때 그녀를 통해 내가 시작했던 것 중 하나가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하루키의 거의 모든 소설을 다 읽었다. 그런데 나는 이 이 영화의 원작이 된 하루키의 단편 토니 타키타니를 읽지 않았었다. 그녀는 읽었을까. 잘 모르겠다. 나중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고, 몇 년이 더 지난 뒤에 그녀가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토니 타키타니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러저러한 이야기다. 그녀는 텅 빈 방의 이미지와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했던 것 같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를 찾아봤다. 그러므로 내게 이 영화는 많은 선경험이 축적된 채 시작한다. 류이치의 음악과 하루키의 문장과 그녀와의 기억들이 엉킨 채로 영화를 봤다.



2. 하루키식 절망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타키타니였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문장은 좀 대단하다. 하루키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온 것인데, 이 문장은 이 기묘한 이야기의 시작에 가장 어울리는 문장이다. 마치 요한복음의 첫 문장 같다. 이 간결하고 담백한 문장, 그러나 뭔가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문장으로 영화는 토니 타키타니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토니 타키타니는 아버지의 타고난 기질과 일찍 시작된 그와의 단절,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단명에 큰 영향을 받아 좀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타인과의 교류에 대한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는 인간으로 자라난 토니 타키타니를 설명하는 다양한 일화들로 영화의 전반이 지나간다. 그가 중학교 때 유모와의 단절을 선언한 이야기라던지, 기술적 드로잉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지만 예술 자체에 전혀 흥미가 없었던 대학 시절의 이야기 같은 것들이 토니 타키타니라는 인물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고독을 모르던 토니 타키타니는 곧 벼락같은 사랑에 빠진다(나는 하루키식의 이 벼락같은 사랑이 좋다, 스미레와 뮤 같은). 그녀를 사랑하며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에 당황한 그는 이상한 방식으로 구애한 끝에 그녀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곧 걱정한다. 고독에서 벗어남으로써 그는 고독에 대한 공포를 알게 되었다. 사랑이 주는 역설적인 공포는 한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해체한 후 재조립시킨다. 그렇게 토니 타키타니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는다.


 그의 결혼생활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녀가 이상하리만큼 옷에 집착하고 과도하게 쇼핑한다는 점만 빼면. 토니 타키타니에게 그 정도의 소비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방 하나에 옷을 가득 채우고도 계속해서 옷을 사들이는 아내의 모습은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는 아내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고, 아내는 수긍했다. 그리곤 아내는 자신을 무리하게 고치려 하다 목숨을 잃는다.


 옷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우리는 어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이유 그대로를 이별할 때 똑같이 되붙이곤 한다. '당신, 옷 스타일이 정말 멋지군' '옷 사는 거, 이제 조금 삼가면 어떻겠어?' 사이에는 시간이 있다. 아주 긴긴 시간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하려 하는 순간, 그 사랑은 깨져버릴지도 모른다. 토니 타키타니에게 그런 식으로 이별이 오게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널려있는 그녀의 그림자를 본다. 텅 비어버린 마음과는 달리 유령들이 부유하는 드레스 룸이 그는 아마 무서웠을 테다. 혼란스러운 토니 타키타니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녀를 잊으려 한다. 하지만 곧 그 방식으로는 자신의 절망을 이길 수 없음을 알게 된 토니 타키타니는, 모든 것을 처분해버린다. 그의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남긴 레코드마저 처분해버린 뒤에야 그는 비로소 온전한 고독과 절망 속에 존재한다. 텅 빈방에 모로 누운 그의 뒷모습이 그의 아버지가 감옥에서 누워있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루키의 이야기에서 폐쇄된 장소에서의 절망은 매번 큰 메타포로 작용한다. 대부분 그 뒤로 죽음을 초극하거나, 절망과 분리되지 못하는 이상한 캐릭터가 만들어진다. 때문에 이런 사건은 하루키 이야기에서 매우 초반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 뒤로 그 이상한 캐릭터를 움직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하루키의 이야기 법 중 하나다. 하지만 토니 타키타니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절망을 경험한다. 


 사실 이 이야기는 2세대에 걸친 구원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길게 주어진다는 점은 인상 깊다. 아버지 타키타니 쇼자부로가 전쟁 중 겪은 기이한 일이 그를 재구성했고, 그로 인해 얻어진 이름 토니는 토니 타키타니를 고독을 모르는 결핍된 인간으로 만들었다. 토니는 절망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에 꺼내졌지만, 사랑을 앎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깨닫는다. 그러니 파란 불이 켜진 방 안에 누운 토니 타키타니의 모습은 반복되는 인간의 절망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3. 이야기하는 방식


 영화는 하루키의 이야기를 빌려 진행되지만, 결코 영화적인 가치를 잃지 않는다. 하루키만의 이야기가 있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영화적 연출이 있을 터다. 이 영화는 내레이션을 통해 하루키의 문장을 직접적으로 발화하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구연동화처럼 열거해가진 않는다. 길게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때때로 등장인물의 입에서 엉뚱한 순간에 종언된다. 극 중에서 연기 중인 인물들이 내레이션의 마지막 문장을 대신 읽는 순간마다 극의 분위기는 기묘해진다. 특히 그 문장들이 발화하는 인물의 심리상태를 묘사하는 부분이었다든지, 결정적 순간의 상황을 묘사하는 순간이었다면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는 깊어진다. 소설과 영화의 중간, 극과 다큐의 중간 어딘가 쯤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연출은, 빛을 적절히 활용한 이 영화의 인상적인 이미지들과 연결된다. 


 황량한 이미지와 기묘한 이야기 방식, 그리고 아주 직설적으로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류이치의 음악이 얽혀 이 영화를 아주 매력적으로 만든다. 아주 하루키적인 영화라고나 할까. 나는 하루키가 영화를 찍으면 이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어느 쪽이 더 나을까. 고독을 모르던, 그러나 사랑도 모르던 때의 토니 타키타니와 사랑을 기억하지만 동시에 고독과 절망을 알아버린 토니 타키타니. 나도 가끔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후자가 낫다. 토니가 어떻게 여길지는 잘 모르겠다.



+ 처음에 남자 배우가 하루키 본인인 줄 알았다. 너무 닮아서 나중에 찾아봤는데 역시 그건 아니었다.

++ 미야자와 리에는 참 아름답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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