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몇 망고였어?

by Gorae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가장 유명한 루프탑 바 ‘sirocco'에서 일하는 촘푸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망고라고 불렀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내가 망고를 너무 좋아해서였다. 그런데 망고는 어쩐지 여자 이름 같아서 나는 촘푸에게 땡모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땡모는 태국어로 수박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잘 먹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태국식 수박 셰이크 땡모반을 매일 두세 잔씩 마셨으니까 그 별명이 내게는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땡모도 여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닉네임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촘푸는 이제 나를 땡모라고 부른다. 태국 사람들은 대부분 긴 본명보다 짧은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데 주로 영어와 태국어의 명사를 닉네임으로 쓴다. 촘푸 역시 장미 사과를 칭하는 태국어라서 촘푸와 함께 호텔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과일 이름을 닉네임으로 쓰는 우리를 과일 남매라고 불렀다.


그렇다. 나는 열대과일을 좋아한다. 열대과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망고를 특별히 좋아하긴 하지만 망고스틴이나 람부탄도 좋아한다. 열대과일이 제철인 우기에 방콕에 머물 때면 매일 저녁 마감세일을 하는 마트나 재래시장에 들러 망고와 망고스틴 그리고 람부탄 같은 열대과일들을 사 온다. 망고스틴은 만졌을 때 말랑한 것이 좋다. 딱딱한 것은 과육이 갈변되어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정에 가까운 진보라색이 신선한 제품이며 꼭지의 초록빛이 선명할수록 신선한 것이다. 망고스틴을 고르다가 제품을 상하게 하면 안 되기에 망고스틴을 고를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표면을 살짝 눌러봐야 한다. 살짝 눌렀을 때 폭신폭신하게 표면이 들어가는 망고스틴을 만나면 무심코 리모컨을 누르다 어릴 적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채널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망고 고르는 법 역시 비슷한데 표면에 검은 반점이 없고 매끈한 것 그리고 살짝 눌러봤을 때 폭신폭신한 것이 좋은 망고다. 같은 망고라도 상품과 하품은 가격차가 많이 나기에 싸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신중하게 열대과일들을 살피고 하나하나 담는 그 시간은 내 인생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기쁨이다.


방콕에 머무는 동안 숙소 냉장고에 망고나 망고스틴 혹은 수박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그리고 게으른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하게 된다. ‘마트 잠깐 다녀오는 게 뭐가 어렵다고 그 지극한 행복을 놓치며 사는 거지?’, ‘이렇게 좋은 방콕에 머물면서 이렇게 한심한 일을 또 저지르다니!’ 마음속으로 그런 푸념을 하지 않기 위하여 나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하여 우기 때는 수시로 마트나 재래시장에 들러 열대과일로 냉장고를 꽉꽉 채워놓곤 한다. 이런 열대과일들은 해장을 할 때도 꼭 필요한 것이라서 기호품이 아닌 생필품에 가깝다. 우기가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 주장에도 일부 동의하지만 제철의 열대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기의 방콕에 머물 이유는 충분하다.


촘푸와 나는 주로 촘푸의 일이 끝나는 새벽에 만나 사람 좋은 주인장 잭이 늘 취한 상태로 손님을 맞는 ‘Jack's bar’에서 촘푸의 동료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거나 망고와 찰밥에 연유를 뿌려서 먹는 태국 디저트 ‘카우니여우마무망’을 파는 식당에 가서 그것을 먹으며 수다를 떨곤 한다. 촘푸는 내가 망고를 먹을 때 과장해서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한다. 촘푸는 두리안을 좋아하는데 두리안이 비싼 과일이기도 하고 촘푸가 일을 마칠 때면 두리안을 파는 노점이나 식당이 거의 없어서 자주는 못 먹지 못한다. 가끔 촘푸가 쉬는 날 낮에 만나 함께 두리안을 먹을 때면 촘푸 역시 내가 망고를 먹을 때와 같은 표정을 짓곤 한다.


어느 날은 속상한 일이 있어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촘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오늘은 망고 없었어?” 그게 무슨 말인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알아들은 나는 촘푸에게 “응, 오늘은 망고 없었어. 대신 내일은 삼 망고 할 거야.”라고 대답해주었다. 망고를 좋아하는 나에게 촘푸는 망고의 개수에 빗대어 내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본 것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자주 촘푸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날의 기분을 망고로 표현하곤 했다. “오늘은 이 망고였어.”, “오늘은 육 망고야!”, “아휴, 오늘은 망고 없었어.” 그러면 촘푸는 자신이 좋아하는 두리안으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곤 했다. “오늘은 중국인들이 너무 많이 와서 두리안 없었어.”, “오늘은 피곤한 손님 없었어. 삼 두리안이야!” 기분이 좋으면 망고 개수를 후하게 부르는 나와 달리 촘푸는 아무리 기분이 좋은 날도 삼 두리안 이상은 부르지 않았다. 내가 가끔 좀 더 후하게 두리안을 부르는 날도 있어야 하지 않냐고 반문하자 촘푸가 말했다. “두리안은 망고보다 훨씬 더 비싸잖아. 나는 두리안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나는 망고로 기분을 표현하는 것이 참 좋았는데, 한 날은 로터스 마트에 망고를 사러 갔다가 망고 스티커를 발견하고 아 이걸로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장 노트와 그 스티커를 사서 매일 노트에 날짜를 기록하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복기하며 망고 스티커 개수로 그날의 기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하루에 망고 스티커를 가장 많이 붙인 개수는 일곱 개였다. 그날은 내가 정말 좋아했던 슈슈를 실롬의 라운지 바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 중인 크라비 호텔로 함께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고 쓰고 싶지만 그건 아니었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일이 잘 마무리되어서 방콕에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날이었다. 랑수언 로드에 있는 루프탑 'speakeasy'에서 혼자 위스키를 마시며 조촐하게 자축을 했던 그날은 지금 생각해도 참 행복한 날이었다.


이제 나는 망고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없으면 안 될 것을 곁에 두면서 살았으면 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정말로 없으면 안 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으면 한다. 망고가 행복이고 행복이 망고가 된 나의 삶. 남은 삶에서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그저 방콕에 머무는 오늘처럼만, 망고 가까이에서 사는 지금처럼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빌뿐이다. 물론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가능한 더 오래 지금과 같은 삶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늘 냉장고에 망고를 채워두는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매일 빈 노트에 망고 스티커를 붙이는 사람이야.” 나의 대답에 그가 의아해하는 표정 대신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나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돌려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너는 몇 망고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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