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태국 나이로 서른두 살이 된 코부아는 방송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일을 하는 프로모션 피디다. 코부아는 몇 해 전 태국 친구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친군데 그 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인스타그램을 통해 서로의 근황을 확인하곤 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도 멋지고 한국인 남자 친구와 잘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언젠가 인터뷰를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주 전 방콕으로 돌아와서 내가 머무는 콘도 로비의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그 사진을 본 코부 아가 자기도 그 콘도에 산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코부아는 내가 사는 곳 바로 아래층에 살고 있었다. 방콕에는 수없이 많은 콘도가 있고 내가 사는 콘도단지 안에도 동이 여러 개 있는데 그 수많은 방콕의 콘도 중에서 한 층 차이로 살고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너랑 인터뷰 한 번 하고 싶었는데 잘 됐다고 하면서 시간 될 때 인터뷰 한 번 하자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코부아는 오늘 밤에 바로 된다고 답을 보내왔다. 그래서 그날 바로 일을 마치고 온 코부아를 콘도단지 안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코부아와는 영어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안녕, 코부아. 이렇게 만나게 되네. 신기하다.”
“그러게, 참 신기하다. 오빠.”
“오빠 대신 킴 혹은 땡모라고 불러줘. 여긴 방콕이잖아.”
“알겠어. 그럴게, 쿤 땡모.”
한국 드라마의 영향인지 태국에서는 언젠가부터 나를 만나면 오빠라고 부르는 여자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나는 오빠라는 호칭이 싫다. 나이와 상관없이 다 같이 친구로 지내는 문화를 좋아하는데 태국에서까지 ‘오빠’라는 말을 들으면 한국에서처럼 서로 나이를 따져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에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코부아는 무슨 뜻이야?”
“연(蓮)이라는 뜻이야. 태국은 불교국가고 이 연이라는 식물이 특별하잖아.”
“맞아.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지. 마트도 Lotus가 있잖아. 그런데 이건 별명이지? 너 태국이름은 뭐야?”
태국 사람들은 본명이 길어서 대부분 본명 대신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는데 주로 태국어 명사나 영어 명사를 별명으로 쓴다. 그런데 나는 늘 태국 친구들을 만나면 별명 말고 본명을 물어보곤 하는데 부르기 편한 별명도 좋지만 긴 태국이름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태국이름은 길어. 와디눅 루앙 오 차.”
“나는 코부아라는 별명보다 그 이름이 더 예쁜 것 같은데?”
“그런데 태국 사람들은 보통 별명으로 서로를 불러. 태국이름은 너무 길잖아.”
“그건 아는데 나는 긴 태국이름들이 참 예쁘더라고. 아무튼 코부아가 지금 하는 일은 뭐야?”
“나는 티브이나 라디오에 방영되는 프로그램들의 홍보를 담당하는 프로모션 피디를 하고 있어.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전에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지.”
“재밌는 일을 하는구나.”
“응. 이 일 재밌어.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좋고. 내 친구들 중에는 내가 연예인들을 자주 만난다고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많아. 근데 늦게 마칠 때가 좀 많긴 해.”
“그렇구나. 자기 일을 자랑스러워하고 멋지네. 너는 원래 고향이 방콕이야?”
“아니야. 나는 러이엣이라는 곳에서 나고 자랐어. 들어봤어?”
“물론이지. 거기 가본 적도 있어. 이 년 전에 이싼 지역을 여행했거든. 콘캔과 러이엣, 치앙칸 등등.”
“오, 그렇구나. 러이엣 어땠어?”
“음, 거긴 정말 아무것도 없던데. 정말 아무것도.”
“( 웃으며 ) 맞아. 방콕에 비하면 거긴 진짜 시골이야. 근데 나는 그런 게 좋아. 조용하고 한가롭고. 그런 게 진짜 태국 사람들의 삶이야.”
“관광객들은 알 수 없는 진짜 태국 사람들의 삶?”
“음, 글쎄. 당연히 방콕이나 푸껫에서만 짧게 머물다 가는 관광객들은 알 수 없겠지. 그런데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곳에 가서 여유롭게 머물면 태국 사람들의 진짜 삶을 엿볼 수 있는 곳들이 있어.”
“거기가 어딘데?”
“치앙라이, 펫차분, 매홍손 같은 곳들. 아 그리고 라농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여긴 태국 사람들도 잘 몰라. 거기도 참 한적하고 바다도 좋아.”
“아, 라농 들어봤어. 미얀마 인근이지?”
“맞아, 역시 땡모는 태국 사람들보다 더 ‘콘 타이’네. 나는 얼마 전에 일 때문에 거길 다녀왔는데 거길 정말 강력 추천하고 싶어. 태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도시 중 하난데 정말 조용하고 바다가 예뻐. 아, 그리고 태국에서 가장 비가 많이 오는 곳이야. 거기는 우기가 팔 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고.”
“우기가 팔 개월이나? 우와, 나는 우기를 정말 좋아하는데 거기 정말 가보고 싶다. 잠시만 라농 한 번 검색해볼게.”
잠시 스마트폰으로 한국 검색 사이트에 접속해 라농을 검색해보자 별 다른 정보가 없었는데 라농을 소개하는 백과사전의 글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냥 딱딱한 백과사전의 글이었음에도 거기에 있는 단어들 몇몇의 조합이 여행의 세포를 마구 깨어나게 했다.
“와, 라농에 대한 소개글을 봤는데 정말 여기 가보고 싶어 진다. 조만간 꼭 가봐야겠어. 요즘엔 태국에서 길게 체류하는 한국인들도 많아져서 난을 가는 사람들도 종종 있더라고.”
“아, 난을 알아? 난도 좋아. 진짜 태국 사람들의 슬로 라이프가 궁금하면 거기도 추천할만한 곳이야.”
“맞아, 난도 좋다고 하더라고. 나도 아직 안 가봤는데 조만간 가게 될 것 같아. 치앙마이는 어때? 추천하지 않아?”
“아휴, 말도 마. 치앙마이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치앙마이가 아니야.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와서 시끄러운 곳이 되었어. 진짜 태국 사람들의 삶을 느끼고 싶다면 치앙마이는 추천하지 않아.”
“응,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치앙마이도 그 나름대로 매력이 있긴 하잖아.”
“맞아, 나도 치앙마이를 좋아하긴 하는데 치앙마이도 이제 관광객들을 위한 곳이 되었잖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하지만 치앙마이나 방콕 그리고 푸껫, 끄라비 같은 곳들은 세계적으로도 아주 특별한 도시들이잖아. 그곳들만의 라이프스타일이 있는 거지. 그런데 방콕이나 푸껫이야 관광지, 휴양지지만 치앙마이가 변해가는 건 좀 아쉽긴 하다.”
“맞아. 태국 사람들도 치앙마이는 정말 좋아하는 곳이었는데.”
“부처님께서 열반하기 전 마지막 하신 말씀처럼 세상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이지.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태국이 변해가는 건 아쉽다. 코부아는 방콕에 언제 왔어?”
“글쎄, 대학을 오면서 온 거니까 십오 년 조금 안된 것 같네.”
“방콕 생활은 어때?”
“음, 방콕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 다양한 직업, 다양한 국적,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이 만드는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영감도 얻고 배우는 것도 많고. 그러는 땡모야말로 왜 방콕이 좋아? 나는 한국도 좋던데 땡모는 거의 태국에 살다시피 하잖아.”
“나는 네가 말한 것처럼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하지 않는 도시라서 방콕이 좋아. 방콕 사람들은 오픈 마인드잖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도 인사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곳.”
“맞아, 한국은 안 그래?”
“응, 태국에서는 낯선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서로 미소를 보내주잖아. 한국에서는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웃으면 싸움이 나.”
“정말? 왜 그런 거야?”
“글쎄 한국이랑 태국은 서로 문화가 다른 거지. 한국은 모든 것이 가족 중심이라서 가족이 아닌 낯선 이를 배척하는 거고. 서울은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야. 다들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욕망들을 가지고 살아가. 단적으로 태국에서는 남자가 꺼터이가 되거나 여자가 톰보이로 살아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 그래? ‘마이 뺀 라이’잖아. 한국에서는 그러면 사회생활을 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겨. 뭐 이것 말고도 무수한 예들이 있지만 그냥 단적인 예를 든 거야. 어디가 옳다 그르다 말할 수는 없지만 방콕 같은 도시가 나에게는 더 맞아. 이제 방콕은 나에게 여자 친구가 아니라 와이프 같아.”
“진짜 방콕을 좋아하는구나. 아, 방콕 사람들은 진짜 오픈 마인드지. 각자 자기 라이프스타일대로 사는 거야. 예전에 한국에 사는 남자 친구가 나를 보러 방콕에 자주 왔거든. 근데 내가 평일에는 바쁘니까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잖아. 그래서 내가 회사에 남자 친구를 자주 데리고 갔어. 그런데 회사에 가도 나는 녹음실에 가거나 일을 해야 하니 늘 같이 있을 수가 없거든. 그럴 때면 회사 사람들이 다들 남자 친구를 엄청 챙겨줬어.”
“회사에 남자 친구를 데리고 갔다고? 그리고 회사 사람들이 바쁜 너를 대신해 남자 친구를 챙겨줬다고? 한국에서는 정말 상상하기 힘든 일이네.”
“응, 그런 거 보면 나도 진짜 방콕 사람들이 오픈마인드라고 생각해.”
“그래, 재밌다. 나는 그래서 방콕 사람들이 좋아. 남자 친구는 어떻게 만났어?”
“내가 씨앤블루의 정용화를 진짜 좋아했거든. 몇 년 전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씨앤블루가 콘서트를 온다고 하는 거야. 그때 콘서트를 보러 쿠알라룸푸르에 갔을 때 알게 됐지.”
“콘서트장에서?”
“아니, 쿠알라룸푸르 스타벅스에서. 남자 친구는 쿠알라룸푸르에 여행을 온 거였어. 커피를 마시다가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느낌이 좋아서 메신저 아이디를 교환하고 계속 연락했지.”
“아, 그랬구나.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 낭만이네. 그러면 남자 친구 때문에 한국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니고 원래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았구나.”
“맞아, 한국 드라마나 케이팝을 좋아하는 애들 많잖아. 한국 남자들 너무 잘생긴 것 같아. 아 그리고 케이팝이나 드라마 외에도 한국이 태국에 큰 영향을 끼친 일이 또 하나 있어.”
“뭔데? 한국음식?”
“아 물론 요즘 한국음식들도 핫하긴 하지. 소주랑 삼겹살, 한국식 양념치킨. 그런데 그거 말고 한국 성형기술의 발달로 꺼터이들의 미모가 업그레이드됐다는 거야.”
“ ( 크게 웃으며 ) 맞아, 진짜 맞아. 요즘엔 정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꺼터이들이 많더라고.”
“맞아, 정말 한국 의사들은 대단한 것 같아. 아 그런데 나 남자 친구와 헤어졌어.”
“정말? 언제?”
“좀 됐어.”
“나는 모르고 있었네. 괜히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 지금도 여전히 남자 친구가 그립긴 한데 우리는 떨어져 있고 남자 친구의 부모님들이 태국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어.”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너 그 사람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마이 뺀 라이.’ ‘라이프 고즈 온.’ 지금도 많이 보고 싶기는 한데 어쩔 수 없지 뭐.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코부아는 꿈이 뭐야? 목표나 그리는 삶의 방식이 있어?”
“나는 다시 고향에 내려가서 살고 싶어. 부모님은 두 분 다 선생님인데 아직도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셔. 아직은 방콕에서 일을 하는 것이 재밌긴 하지만 가끔은 지치고 외로울 때가 있어. 방콕이 참 좋은 곳이긴 하지만 도시생활은 외로울 때가 있잖아.”
나는 방콕에서 외롭다는 생각을 많이 해본 적이 없긴 했지만 코부아의 말에 일단 동의를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러이엣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어. 아직 러이엣에 사는 친구들도 많이 있거든.”
“사바이, 사바이.”
“맞아, 조용하고 느리게 살고 싶어.”
사실 코부아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좋은 콘도에 사는 나름 방콕에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라서 더 크고 원대한 꿈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꿈이라니. 코부아와의 대화는 아주 유쾌했고 또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방콕이 좋은 이유는 나와 다른 문화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화가 가능한 코부아 같은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다. 다음번에는 주말에 식사를 하면서 더 오래 이것저것 이야기하자고 약속을 하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한 뒤 코부아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코부아는 26층 나는 27층에 내렸다. 방콕이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나는 이방인인데 같은 콘도에 태국 친구가 산다니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자주 마주치겠지? 방콕 생활이 더욱더 재밌어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인터뷰를 정리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가 문득 코부아가 말한 라농이 생각나서 백과사전 사이트에 접속해 아까 검색해 보았던 라농을 한 번 더 검색해보았다. 안다만해, 푸껫 산맥, 말레이 반도, 8개월 간 계속되는 우기. 다시 읽어도 또다시 여행의 세포가 마구마구 깨어났다. 낯선 길, 멀고 먼바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안다만해, 8개월간 계속되는 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