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목소리, 후아힌

by Gorae

밤새 원고를 쓴 뒤 잠깐 잠들었다 일어났더니 지난 일 년 간 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후아힌이 사무치게 그립다. 원래는 며칠 더 방콕에 머물다가 후아힌에 다녀오려고 했지만 이런 마음이 올 때는 그곳에 있는 무언가가 나를 부르는 것이라 믿어서 그냥 지금 바로 후아힌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만날 날이 왔구나. 숙소 예약사이트를 통해 작년에 머물렀던 콘도의 예약 가능 여부를 확인했더니 가능하다. 바로 예약을 하고 지금 머물고 있는 사톤 숙소의 남은 날짜의 예약을 취소했다. 결제한 금액의 일부만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랑 앞에서는 가끔 충동적이고 싶다. 이십 대 후반, 새벽에 통화를 하다 말고 여자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택시를 타고 춘천에 간 적이 있다. 글을 쓰면서 공장에 다니던 그 시절의 내게 그 택시비는 아주 큰돈이었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기 위해서 번 돈이었다. 그때의 그 마음처럼 충동적인 행동으로 그곳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바다에게 나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짐을 정리하고 차량이나 오토바이 택시를 부르는 앱인 그랩을 이용해 택시를 불렀는데 잡히지 않았다. 낮시간에는 콜을 하면 보통 일이 분 내로 잡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몇 번을 시도해봤는데도 잡히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숙소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 시간에 그랩이 잡히지 않는 경우도 있었나? 아무래도 이상했지만 할 수 없이 숙소의 경비원에게 부탁해 팔람썽 빅씨로 갈 테니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다. 작년에 팔람썽이라는 지역에 있는 빅씨 마트 옆에 후아힌으로 넘어가는 롯뚜 ( 미니버스 ) 터미널이 있다는 것을 어렵게 알아냈다. 방콕의 서쪽인 그곳에서 롯뚜를 타면 후아힌으로 가는 시간이 삼십 분 이상 절약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곳에서 롯뚜를 타고 갈 예정이었다.


이내 무뚝뚝한 표정의 택시기사가 도착해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은 후 택시에 올라탔더니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 그래서 내가 팔람썽 롯뚜 터미널에서 후아힌으로 가는 롯뚜를 탈 건데 거기 아냐고 물어보니 거기 잘 아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사실 그 터미널이 워낙 작고 주유소 안쪽에 있어서 평소 그곳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방콕에 사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곳이다. 그런데 택시기사가 안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다. 사실 그냥 택시를 잡으면 기사가 그곳을 잘 모른다고 할까 봐 미리 행선지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해놓은 뒤 기사를 부를 수 있는 그랩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었다. 아무튼 다행이다.


택시는 팔람썽을 향해 달린다. 드디어 후아힌으로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들뜬다. 작년에 딱 한 번 와본 길이었지만 기억이 난다. 그런데 팔람썽 빅씨를 향해 가던 택시는 아무래도 그곳을 지나치는 것 같다. 내가 잘 못 기억하고 있는 걸 수도 있기에 기사에게 제대로 가는 것이 맞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냥 말하기를 멈추었다. 방콕의 택시기사를 오랫동안 봐온 내 기준에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고 지금은 한낮이다. 지금 나는 길 위로 나선 거니까 택시기사가 낯선 곳에 내려주면 거기에서 또 후아힌으로 가는 길을 고민해보면 될 일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 어쩌면 낯선 길 위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늘 그리워하던 후아힌으로 가는 길이니까 그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즐겁게 받아들이자며 그냥 묵묵히 택시기사가 가는 곳을 지켜봤는데 생각보다 멀리 가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는 찰나에 기사가 차를 세워서 도로 옆 흙길 위에 나를 내려주었다. 여기가 후아힌으로 가는 미니버스 정류장이란다. 내가 왜 팔람썽 롯뚜 터미널로 가지 않았냐고 물으니 거긴 터미널이 없어졌다고 한다. 서로 의사소통이 잘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내니 그 터미널에서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택시기사가 내게 다가온다. 천 바트에 후아힌까지 가지 않겠냐고 한다. 천 바트에 후아힌까지 택시로 가는 거면 비싼 가격은 아니라 잠깐 망설여진다. 보통 방콕에서 후아힌까지 가는 택시 가격은 이천 바트 이상이다. 아마도 후아힌으로 돌아가는 택시라 가는 길에 손님을 태워가려고 하는 걸 거다. 어제 잠을 많이 못 자고 큰 캐리어까지 가지고 있어서 편하게 택시를 타고 후아힌까지 가고 싶기도 하다. 게다가 롯뚜는 후아힌 시내에 있는 시계 광장 앞에 내려주기 때문에 거기서 내리면 또 한 번 택시를 타야 한다. 그런데 굳이 롯뚜를 타러 여기까지 왔는데 혼자서 택시를 타고 가야 하나? 요즘 환율도 많이 올라서 돈을 아껴야 하잖아. 그리고 롯뚜를 타고 가면서 롯뚜에 타고 있는 다른 태국 사람들도 좀 지켜보기로 했잖아. 두 가지 생각이 팽팽하게 맞서다 결국 롯뚜를 타고 가기로 한다. 택시 기사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롯뚜 승차권을 파는 판매원에게 티켓을 사려고 하는 순간 택시기사가 나를 부르더니 그러면 지금 출발을 해야 하니 그냥 롯뚜를 타는 가격 백팔십 바트에 택시를 태워주겠다고 한다. 나는 잠깐 멍해졌다. 백팔십 바트? 단 돈 백팔십 바트로 택시로 방콕에서 후아힌까지? 서울에서 강릉까지 가는 거리를 칠천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으로? 롯뚜 티켓을 파는 아저씨의 얼굴을 한 번 스윽 쳐다보니 아저씨가 웃으면서 고개를 택시 쪽으로 돌리며 택시를 타라는 시늉을 한다.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택시기사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얼른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었다. 백팔십 바트!


후아힌에 살면서 택시기사를 하는 그 기사의 이름은 나팟으로 마흔아홉 살의 톰보이였다. ( 톰보이는 남자 역할을 하는 레즈비언이다. 태국에는 톰보이들이 아주 많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 마침 나팟의 집은 내가 머물게 될 숙소 바로 뒤편이니 숙소 로비에 안전하게 내려주겠다고 한다. 차분한 성격의 나팟과 천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가던 중 나팟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아주 앳되어서 나팟의 딸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나팟의 딸은 얼핏 듣기에도 아이스크림 브랜드 이것저것을 이야기하며 그걸 사 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팟은 아주 다정하게 그 전화를 받았는데 끊고 나서 딸이냐고 물어보니 친구란다. 어릴 적 친구인 그녀가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병원에 있는데 말이나 행동하는 게 애 같아졌다고 한다. 오늘 저녁에 그 친구의 병원에 놀러 가기로 해서 약속을 지키려고 급하게 후아힌으로 내려가는 거란다. 다정한 사람, 나팟.


택시를 타고 가는 중간에 나팔이 기름을 넣기 위해 휴게소에도 들렀는데 나팔을 기다리면서 한가롭게 커피 한 잔 마시고 있던 중 청소부 할머니를 따라다니는 고양이가 눈에 띈다. 고양이가 아주 사람을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니 고양이가 경계를 하며 벤치 아래로 숨는다. 고양이는 오직 할머니만 믿고 의지하며 할머니가 청소하기 위해 움직이는 이곳저곳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평소 할머니가 고양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눈에 그려져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런 풍경을 보며 한가롭게 휴게소에서 머무는 시간이 참 좋았다.


다시 후아힌을 향해 가는 길에 사고가 난 차량이 있어서 길이 막힌다. 정체가 풀리기를 기다리던 나팔이 저 멀리 아주 커다란 비구름 떼가 있는 것을 보고 펫차부리에 가면 비가 쏟아질 거라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펫차부리에 들어서자 우박처럼 맹렬하게 차체를 때리는 비가 쏟아진다. 그 순간, 나팟이 무당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런데 이것은 무당이 아니라 우기를 오십 번 가까이 겪어본 태국 사람의 감이겠지. 나도 앞으로 우기를 오십 번 더 겪어봐야지. 폭우 속에서 십 여분을 더 달리니 구름 떼를 빠져나왔고 그렇게 맹렬하던 비가 순식간에 멈추었다. 아마도 후아힌은 맑은 얼굴로 나를 맞아주려고 하나보다. 후아힌에 거의 다 왔다.


그런데 지금 보니 택시의 미터기가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벌써 천칠백 바트가 찍혀있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백팔십 바트는 그냥 시외요금 할증료고 미터에 찍힌 요금을 따로 내라고 요구하려는 건가? 태국 사람들 대부분 친절하고 정직하지만 가끔 외국인들을 상대로 말을 바꿔가면서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이 있어서 괜히 걱정이 된다. 나팟의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이 참 좋아서 팁을 주는 건 상관없지만 괜히 돈 문제로 나팟이랑 얼굴을 붉히는 것은 싫은데. 사실 백팔십 바트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긴 하다. 어쨌거나 나팟 덕분에 편하게 왔으니 서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는지 나팟과 다시 잘 이야기해보자고 생각했다. 그 어떤 관광보다 나팟과 함께 택시를 타고 달려온 그 세 시간 이 마음 편하고 행복하긴 했으니까.


역시 나팟은 내가 머물게 될 숙소를 잘 알아서 나를 로비까지 데려다주었다. 나팔이 얼마를 더 달라고 할지 몰라 지갑을 꺼내고 있는 사이 나팟은 그 작은 체구로 트렁크에서 캐리어까지 꺼내 주었다. 나팟에게 얼마를 줘야 하냐고 물으니 백팔십 바트를 달란다. 천팔백 바트가 아니라 백팔십 바트? 역시 내가 오해한 게 아니었구나. 나는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지갑에서 꺼낸 오백 바트를 주며 거스름돈으로 친구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병원에 가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나팟은 웃으며 친구가 좋아할 거라고 고맙다고 한다. 나팟의 라인 아이디를 받아놓고 다음에 택시가 필요하면 부르겠다고 한 뒤 나는 로비로 들어가 체크인을 했다. 드디어 이곳에 다시 왔구나. 사실 후아힌의 바다도 그리웠지만 이 숙소가 참 그리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십오 층으로 간다. 마침내 이십오층에 도착해 작년에 머물렀던 오백팔십칠 호로 들어선다. 카드키를 도어록에 갖다 대니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문이 열린다. 작은 식탁과 편안하던 침대가 작년에 내가 머물 때와 똑같은 모양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커튼을 열었더니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그 풍경 그대로다. 너무나도 감동이다. 많은 것들이 너무도 빨리 변하는 시대에 이렇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을 만나면 그저 감사하고 그저 감동일 따름이다. 아침에 문득 후아힌이 가고 싶어서 며칠간의 숙소비용을 포기하더라도 오늘 그곳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뒤 그랩 택시를 불렀는데 그랩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일반택시를 탔다. 그런데 그 택시기사는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내려다 줬다. 거기서 나팟을 만나게 되었고 단 돈 백팔십 바트로 너무나 편하고 행복하게 후아힌으로 왔다. 과연 이것이 우연이었을까? 후아힌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는 말로 설명하는 게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간절히 부르고 있는 목소리가 있다. 남은 있는 생애는 그 목소리에 더욱더 귀를 기울이며 살고 싶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작은 수박 한 통과 쪽지가 하나 놓여 있다. ‘Welocme again, Tengmo.' 이곳의 호스트인 데렉이 작년에 머무는 동안 내가 이야기했던 내 태국이름을 기억하고 수박과 쪽지를 남겨둔 것이다. 그래,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다시 왔다. 다시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후아힌은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내가 사랑했던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맞아주었다. 이 감동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후아힌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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