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고의 요정

by Gorae

지난 토요일 새벽에는 불안장애가 찾아와서 힘든 밤을 보냈다. 지난주 내내 밤을 새우면서 여러 가지 원고를 쓰고 카페인을 과다 섭취했더니 몸과 마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깊숙한 우물 안으로 떨어져 버렸다. 흡혈귀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혼자 남겨진 인류가 된 것 같은 그 기분.


적당히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일기를 쓰면 괜찮아지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몸은 너무도 피곤한데 잠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수면유도제를 먹으면 두 번 다시 깰 수 없을 것 같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냥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인류로써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문 밖에서는 흡혈귀들이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가 살아남아서 혹시나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인류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도 무서웠다. 금세 문이 열리고 흡혈귀들이 나를 찾아올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어제 사놓은 망고 찰밥이 냉장고에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모든 존재에는 요정들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데, 망고의 요정이라면 지금의 나를 구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투명 플라스틱 상자 속에 담긴 망고 찰밥 두 개가 있었다. 망고는 약간 색이 변하긴 했지만 먹을 수는 있는 상태였다. 눅눅해진 망고와 딱딱하게 굳은 찰밥을 함께 먹으면서 간절히 망고의 요정을 소환했다. 나를 지켜달라고. 인류를 지켜달라고. 여기서 살아남게 된다면 일회용 빨대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멸종 위기의 갈라파고스 땅거북을 위해 기부를 하고 전기요금은 밀리지 않고 납부할 것이며 조카랑 캐치볼을 할 때 조카가 실수로 공을 멀리 던져도 화를 내지 않겠다고. 앞으로 일주일간은 수박이나 다른 과일은 절대 먹지 않고 망고만 먹겠다고. 맹세할 테니 나를 도와달라고. 간절히, 간절히 망고의 요정을 불렀다. 계속해서 살아남아서 글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이 무서운 마음, 아무것도 아니고 또한 전부인 이 무서운 마음이 빨리 사라지게 해 달라고.


내가 지금 죽으면 역시 시련 앞에서 좌절하는 것이 인간이구나라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런 것은 좋지 않은데. 인간은 시련을 통해 아름다워지는 존재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릴 기회를 주십시오.


아무튼 생각나는 대로 마구 기도를 하며 망고의 요정이 나타나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망고의 요정이 나타나 나를 꼭 안아주면서 ‘땡모야! 너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구나. 이제 두 번 다시 수박이나 구아버 같은 것은 먹지 말고 오직 망고만 먹으렴. 아이스크림도 망고 아이스크림만 먹는 것이 좋겠구나. 너를 지켜주는 것 망고 밖에 없단다.’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음이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아마도 기도를 한 덕분이었으리라. 계속해서 생각나는 대로 기도와 맹세를 하고 있으니 흡혈귀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잠잠해졌고 이내 창밖이 밝아졌다. 해가 뜬 후에는 마음이 안정이 되어 쓰러지듯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방콕에 와서도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사업을 하는 선배가 전화로 이야기했다. 그럴 거면 한국에서 일을 하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그건 그렇지 않다. 바빠서 여유롭게 방콕을 즐기지는 못해도 방콕에 있어서 행복하다. 방콕에 있어서 안심이다. 지금 하는 일들 모두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일들이고 방콕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열심히 하는 일들이다. 방콕에서 행복하다.”라고 늘 이야기를 해오던 대로 답을 했지만 과연 그런 걸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참 행복한 일이지만 어쩌면 그건 열정이 아니라 욕심이 아니었을까?


이방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돌보아주지 않으면 안 된다. 햇살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요정이 나를 지켜주듯 나 또한 나를 잘 돌보아 누군가를 지켜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 나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언제나 나 자신밖에 없다. 다시 한번 생각들을 정리할 기회를 준 밤이었다. 많이 힘들었지만 그 밤을 이겨냈고 오늘 방콕에는 모처럼 맑은 날이 찾아왔다. 어쨌거나 잘 이겨내면서 여기까지 왔다. 주말 마켓이 열리는 한가로운 풍경을 쳐다보다가 조각과일을 파는 노점에 가서 수박을 사서 먹으려고 하는데 누가 등을 세게 쳤다. 아! 망고의 요정?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수박을 사는 것을 멈춘 뒤 뒤를 돌아봤다. 내 등을 친 사람은 망고의 요정이 아니라 같은 콘도에 사는 친구 코부아였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안도감에 휩싸였고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요정들이라는 것을. 방콕의 루프탑 바와 인피니티풀을 좋아하지만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던 건 역시 낯선 사람들의 사소한 친절들이었다.


코부아가 뭐하냐고 묻길래 나는 절대 수박을 사려던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 뒤 망고를 사러 빅씨 마트로 갈 거라고 했다. 모처럼 맑은 날이 찾아와 방콕에 사는 요정들도 기분이 좋았을 것 같은 그런 일요일 오후였다. 마트에 들러 망고를 여러 개 사 왔는데 마음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역시 망고에는 요정들이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나도 나를 잘 돌보아 누군가에게 요정이 되어 줄 차례다. 방콕에서는 나도 요정이 될 수 있다. 나를 잘 돌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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