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아도 되는 일

by Gorae

방콕 시암에 있는 마분콩 전자상가에 다녀왔다. 마분콩은 서울의 용산이나 강변에 있는 전자상가 같은 곳이다. 태국에 있을 때 스마트폰을 분실하거나 고장 나면 일에 차질이 생기기에 여러 개를 가지고 다니는데 태국에서는 중고도 비싸게 팔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중에 하나를 처분할까 싶어서 들러본 것이다.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가지고 있던 중고 전자기기를 흥정해서 팔기. 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재밌을 것 같았다. 중고기기를 취급하는 가게를 찾아 내가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의 처분 가격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한국에서 유통되는 스마트폰은 사진을 찍을 때 소리가 나서 비싸게 값을 쳐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얼마냐고 물으니 한국폰이라서 가격을 덜 쳐줬는데도 한국에서 중고로 팔 때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일단 알겠다고 하고 다른 가게들을 몇 군데 더 들러 보았다. 어떤 곳의 점원들은 친절했고 어떤 곳의 점원들은 무뚝뚝했지만 그래도 흥정을 하는 재미가 있어서 여러 군데에서 내 스마트폰의 중고 처분 가격을 물어보았다. 다들 비슷한 가격을 불렀는데 상가 제일 안쪽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가게에서는 다른 가게들보다 삼천 바트 이상은 더 주겠다고 했다. 삼천 바트면 지금 환율로 십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이다. 게다가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점원이 아주 친절하게 이것저것 안내해줬다. 나는 역시 여러 군데 돌아다녀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여기서 스마트폰을 팔아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막상 여분의 스마트폰을 처분하려고 하니 태국에 머무는 동안 급하게 여분의 스마트폰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다시 일었다. 잠시 망설이다 내가 오늘은 스마트폰의 부속품들을 안 가지고 왔으니 조만간 충전기를 비롯한 부속품들을 모두 가지고 와서 일괄 처분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친절한 점원은 그러는 게 가장 좋다고 하면서 언제든지 오라고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스마트폰을 처분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여분의 스마트폰을 생각보다 비싸게 처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뭔가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리고 ‘태국에서 중고 전자기기를 흥정해서 팔기’라는 난제도 무사히 이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해보는 것은 즐겁다. 태국에서는 그간에 한국에 살면서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 이제 나가서 시암 역 근처에 있는 할머니가 하는 작은 노점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튀김을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들른 가게에서 스마트폰 가격을 흥정을 할 때부터 나를 지켜보던 뷰티숍의 여점원이 영어로 말을 걸었다.

“헬로, 웨어 아 유 프롬?” 호객을 하는 점원들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접근을 시도하기 위해 늘 하는 질문이라 나는 태국어로 답해줬다. “콘 까올리 캅.” ( ‘한국사람입니다’라는 뜻의 태국어 ) 태국어로 답을 하는 것은 내 나름대로는 ‘나 태국에서 좀 살았으니 섣불리 사기 치려고 하지 마’라는 뜻의 선전포고 같은 것이다. 내가 태국어로 답을 하자 다시 여점원이 “태국말 잘하니?”라고 물어봤고 나는 조금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러자 여점원이 신이 나서 태국어로 급하게 무어라 이야기했는데 지금 프로모션 중이니 오백 바트에 얼굴 마사지와 팩을 받으라는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오백 바트면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그런 곳에서 관리를 받아본 적 없는 나에게는 다소 생소한 일이라 하지 않겠다고 거절을 했다. 오백 바트에서 삼백 바트만 더 추가하면 Arno's에서 맛있는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떠올랐다. 그랬더니 여점원이 전단지를 한 장 주면서 팩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눈썹 왁싱을 해보라고 했다. 이것도 프로모션으로 단 돈 이백 바트라고 했다. 나는 눈썹 왁싱이라는 말을 듣고는 눈썹을 모두 미는 거냐고 내가 왜 그런 걸 하냐고 물었는데 여점원은 그게 아니고 눈썹을 예쁘게 다듬어 주는 거라고 했다. 눈썹만 다듬어도 인상이 확 달라질 수 있다며 여점원은 열심히 설명을 했다. 나는 남자가 왜 눈썹을 다듬냐며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여점원은 끈질기게 남자는 다른 시술 없이 눈썹만 잘 다듬어도 인상이 아주 좋게 바뀔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예전에 국내 삼 대 연예기획사 중 한 곳에서 일하며 많은 가수들을 스타로 만들었던 친구 하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빠, 남자도 경락마사지 좀 받고 눈썹 다듬으면 인상이 아주 좋아져.” 그 당시 친구의 말을 듣고 그 친구가 추천해준 눈썹 정리해주는 가게를 검색해보았는데 시술 가격이 생각보다 아주 비쌌고 예약도 꽉 차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 눈썹을 다듬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그런데 어쨌거나 이곳에서는 서울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가격인 단 돈 이백 바트로 눈썹 왁싱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운명이다. 너무나 부담 없는 가격이니 한 번 시도해보자.’ 결심을 하고 눈썹 왁싱을 해보겠다고 하니 여점원은 반색하며 잘 생각했다며 급하게 나를 가게 안으로 인도했다. 점원이 안내한 대로 미용의자에 앉으니 점원이 등받이를 뒤로 젖혀 거의 눕다시피 했는데 그 상태에서 눈을 감고 눈썹 왁싱을 받았다. 먼저 따끈한 점액을 미간과 이마에 묻힌 뒤 액체가 굳자 그걸 떼어내는 작업을 했고 그 후 족집게로 눈썹 주변의 잔털을 하나씩 뽑았다. 누군가가 나의 좋은 인상을 위해 관리해주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생전 처음 받아보는 눈썹 왁싱이었음에도 여점원의 솜씨가 형편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름 친절하게 이것저것 말도 걸어주고 열심히는 하는데 아무래도 좀 서툰 것이 느껴졌다. 작업이 끝난 후 거울을 보니 역시나 눈썹 주변에 잔털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눈썹 왁싱을 하기 전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사실 한국사람들처럼 모든 일들을 꼼꼼하게 하는 사람들도 드물다. 태국에서 단 돈 이백 바트로 한국의 샵 같은 결과물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왁싱 전과 후가 조금이라도 달라졌으면 했는데 달라진 것이 정말 없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이제는 느긋한 태국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클레임을 걸어봤자 특별히 더 대단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웃으며 이백 바트를 지불한 뒤 수고했다는 말을 남긴 뒤 가게를 빠져나왔다. 여점원은 인상이 정말 좋아졌다며 금방 여자 친구가 생길 테니 다음엔 꼭 여자 친구랑 함께 관리받으러 오라며 너무나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끔 태국 사람들에게 짜증 나는 일이 생길 때도 태국 사람들 특유의 해맑음과 마주하면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다. 도무지 귀여운 사람들 같으니.


비티에스 ( 방콕 지상철 )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면서 결과물은 아쉽긴 했지만 한국에서라면 하지 않았을 눈썹 왁싱을 부담 없이 해본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태국에 머무는 동안 더 자주 해보지 않았던 일들 혹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 생각했던 일들을 해보리라 다짐했다. 온눗 역에 내려 숙소로 걸어가는데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왁싱샵이 눈에 띄었다. 다리털 왁싱이 오백 바트라고 적혀있어서 다음엔 다리털 왁싱에 도전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태국에서는 가격이 저렴하니 도전해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태국에서는 국적불문, 나이불문, 성별불문,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자신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비난하거나 혐오하지 않는다. 남자가 여장을 하고 다니든, 육십 대 할아버지가 빨간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클럽에 가든, 불교 국가에서 교회를 다니든, 여자가 킥복싱을 하든 아무도 그들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태국에서는 성별이나 나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하지 못했을 일도 한 번씩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것이다. 태국은 태국어로 ‘쁘라텟 타이’인데 자유의 나라라는 뜻이다. 나라의 이름처럼 태국은 정말로 모든 것들이 자유인 곳이다.

사실 종종 스파에 가서 발마사지나 태국 마사지를 받는 일도 한국에 있을 때는 하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마트에 들렀다가 저렴한 가격에 꽃을 몇 송이 사들고 와서 노트북 앞에 놓아둔 물 잔에 꽂아두는 것도 한국에서는 잘하지 않는 일이다. 태국살이가 한국살이보다 생활비가 적게 든다고는 말할 수 없다. 특히 가파르게 물가가 상승하고 있는 방콕에서 지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국과 똑같은 생활비를 지출했을 때 태국에서는 훨씬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동네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실 돈이면 태국에서는 호텔 루프탑 바에서 야경을 보며 칵테일 몇 잔을 마실 수 있고 한국에서 영화 관람을 할 돈이면 태국에서는 한 시간 동안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대학가 원룸 월세 정도면 태국에서는 수영장과 피트니스룸이 건물 내에 있는 고층 콘도에서 거주할 수 있다. 태국에서는 선택지가 있다. 럭셔리한 것들을 쫓아 돈을 쓰려면 한도 끝도 없이 돈을 쓸 수 있는 곳이 태국이고 또 소박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이천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정성스럽고 맛있는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태국이다.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든 멸시받지 않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태국인 것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부담 없이 해볼 수 있어서 태국을 좋아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던 일들 혹은 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던 일들을 막상 해보니 참 즐거워서 삶의 기쁨이 다양해지는 곳 태국에 있어서 행복한 하루하루다. 무용하다고 믿었던 일들이 그 나름의 존재가치가 있고 무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풍성해지는가? 그런데 또 무용하다고 믿었던 그 일이 실제로 무용하면 또 어떤가? 효율만을 따지면서 산다면 도대체 우리의 삶은 언제 낭만을 들여다볼 수 있는가 말이다. 내일도 나는 태국에 머물며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던 일들을 해볼 것이다. 카오산 인근의 미용실에서 한국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레게머리를 해볼까도 싶고 다리털 왁싱도 받아볼까 싶다. 우기가 지나가면 피피섬으로 가서 스노클링도 해볼 것이다. 무용하다고 믿었으나 무용하지 않은 것들 혹은 무용해서 아름다운 일들을 하며 그렇게 지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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