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방콕에서만

by Gorae

춥구나. 추웠겠구나, 너는.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다. 아무리 좋은 날들이 많아도 삶 속에는 힘든 날이 오게 마련인데 그 힘든 날에 그 사람이 힘들고 아플 것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난다. 예전에 만나던 사람에게 이런 마음을 편지로 써서 보냈더니 “뭐래, 오늘도 다섯 끼나 먹었는데.”라는 답이 돌아오긴 했지만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다. 약하디 약한 내가 이렇게 흉포한 세상 속에서 그 사람을 지켜줄 수 있을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긴 겨울 속에서 그 사람을 지켜줄 수 있을까?


춥구나. 추웠겠구나, 너는.


때로는 지나치게 덥고, 때로는 지나치게 추운 날씨 속에서 그의 아름다움이 훼손되지는 않을까? 나의 사소한 몸짓 하나에 그의 다정함이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까? 사랑에 빠지면 늘 마음이 아프고 걱정이 많아진다. 사랑 안에서 단 한순간도 마음 편히 행복하기만 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이면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랑을 하는 것보단 혼자 무연히 지내는 날들이 더욱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다시 찾아오게 마련이다. 도망치거나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가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찾아온 사랑을 그저 받아들이게 되는 것뿐이다.


방콕으로 온 것 역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여행에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든 글을 쓰는 일을 해서 살아남겠다는 꿈이 있었던 이십 대의 끝 무렵,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한 애니메이션의 제작사에서 보내준 해외 워크숍을 통해 이곳을 만나게 되었다. 함께 모여서 작업을 했던 연출팀들과 달리 혼자 원고를 썼던 나는 그곳에 온 스텝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하루 일정이 끝난 저녁시간에 맥주를 마시기 위해 혼자 숙소 앞 식당에 갔을 때 춤과 노래로 흥겹게 저녁시간을 보내던 태국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도 아주 오랜 친구처럼 상냥하게 대해주었는데 그 상냥함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그때 나는 단체 워크숍으로 짧게 여행을 갔던 거라서 도시 깊숙이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방콕이 특별한 것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방콕이라는 도시는 무언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 특별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즈음 한 영화 제작자와 친해졌는데 그 역시 방콕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방콕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풀어놨고 방콕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더욱더 증폭되었다. 결국 워크숍을 다녀온 뒤 두 달 후, 하고 있던 일들을 잠시 미뤄놓고 방콕이 가장 무더운 시기인 오월 말에 그곳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방콕에 도착했을 때 설레던 마음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는 약 보름간 여행을 했었는데 방콕뿐만 아니라 육로로 씨엠립까지 이동해 앙코르 와트도 보고 오는 코스였다. 그 보름 동안 내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방콕에 빠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여행 자체를 아주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 여행 이후 일 년에 두 달씩은 꼭 여행을 다녔다. 삼바 축제를 보기 위해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도 다녀오고 남미 대륙 최남단에 있어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도 다녀왔다. 어릴 적부터 연극을 했던 내가 정말 가보고 싶었던 뉴욕에도 다녀왔고 유럽의 여러 도시들도 다녀오는 등 정말 열심히 여행을 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별로였던 곳들도 있었지만 뉴욕이나 베를린처럼 아주 마음에 드는 도시들도 있었다. 하지만 방콕 같은 곳은 방콕 밖에 없었다.


여행을 하면서도 늘 방콕을 다시 가고 싶었지만 매번 방콕에만 가는 건 너무 게으른 것 같아서 방콕에 가고 싶은 걸 꾹 참고 해마다 늘 새로운 도시들을 여행을 다니곤 했다. 방콕은 언제든 또 가면 되니까. 방콕은 언제든 다시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제 삶이 좀 안정을 찾았구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시기에 큰 시련이 연속적으로 찾아왔고 여행 같은 것을 꿈꿀 수 없는 삶을 살아야만 했다. 사실 여행을 가지 못하는 것은 괜찮았다. 하지만 방콕을 갈 수 없다는 건 너무나도 끔찍했다. 만약에, 만약에 기적이 일어나 지금 이 시련이 지나가면 나는 다른 곳은 가지 않고 무조건 방콕으로만, 태국으로만 여행을 가리라고 마음먹었다. 아니, 아니 지금 이 시련이 지나가면 여행이 아니라 가능한 한 오래 태국에 머무르리라. 다른 모든 욕망은 포기하고 오직 가능한 한 오래 태국에 머무는 일에만 욕심을 부리리라. 만일 이 힘든 날들이 지나간다면. 그간에 그렇게 사랑했던 방콕에 갈 기회가 많았음에도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갔던 나의 오만을 눈물 나게 반성하면서 매일 그런 다짐을 했다. 나는 오직 방콕에서만 머무르리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긴 겨울도 결국은 지나갔다. 요즘 나는 다시 방콕으로 돌아와서 지내고 있다. 방콕에 오래 머물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했더니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래, 많은 것을 잃었지만 사랑을 얻었다. 지난날에 내가 겪었던 시련은 방콕이 자신에게만 충실하라고 보낸 메시지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물속으로 들어가 ‘이제는 네 곁에서만 머물게. 우리 다시는 그렇게 긴 겨울을 맞이하지 말자.’라고 방콕에게 말을 건넨다. 그렇게 큰 시련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방콕으로 왔고 방콕으로 와서 많은 시련을 흘려보낸 것을 보면 방콕과 나는 운명이었던 것 같다.


요즘 나는 다시 방콕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 길을 걷다가도 문득 태국 사람들의 솔직하고 다양한 표정들과 마주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한다. 사는 게 쉬운 사람은 없다는데 이 친절하고 아름다운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 시련들을 겪으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하나하나 다 사랑스럽고 하나하나 다 마음이 아픈 방콕의 골목골목들.


늘 이렇게 방콕에 있으면 행복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들은 내 마음을 알 거다. 너무나도 마음이 아픈 행복 속에 있다. 그렇다. 마음이 아픈 행복이다. 사랑이다. 운명이다. 방콕과 나는 운명으로 서로를 다시 만났다. 길을 걷다가도 왈칵 눈물이 나고 이른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설레는 이곳, 방콕에 살고 있다. “우리 다시는 그렇게 긴 겨울을 맞이하지 말자.” 사랑하는 마음이 감추어지지 않아 이 더운 날씨에도 나는 늘 방콕을 걱정한다. 춥구나. 추웠겠구나, 너는.


나는 누군가 사랑하면 그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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