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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Jun 19. 2019

#1. 가난한 호사가의 미술사 여행

필리핀 바기오로 돌아가 현재의 나를 보다

프롤로그

 

여행 마지막 날 밤이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스텝인 유야는 리가르도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해 미야기의 전통음식 오쿠주가케(Okuzukake)를 만들고, 직접 주조한 막걸리 타푸이를 내어 놓았다. 숙소에 남은 손님들과 리가르도의 친구들은 저마다 가져온 럼, 사케, 주전부리를 꺼내놓고, 밤이 늦도록 유쾌하고도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며 아쉬움을 달래던 중이었다.


“바기오엔 무슨 일로 왔어?” 가장 늦은 시간에 도착한 헥터가 물었다.

깊은 밤 나지막하게 전해진 그의 목소리와 필리핀 남자 특유의 깊고 진한 눈 때문이었을까. 떠나기 전날 밤의 가라앉은 기분이 술기운으로 살짝 들떴기 때문이었을까. 7년 만에 다시 온 바기오,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일종의 회상 여행이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그 말이 바로 바기오에 온 이유였다.      

바기오는 내게 소박한 고향마을이었다. 고향은 그곳에서 성장한 사람을 넉넉하게 보듬어 품어주는 정신적 치유의 공간이다. 도시의 곳곳을 걸으면 걸을수록 이곳에 그토록 남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힘든 순간마다 머릿속에 스치던 바기오의 풍경이 왜 그리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알 수 있었다. 7년 전 비자 만료를 앞두고 나는 친구에게 “필리핀에서 구걸을 할지언정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정말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라며 떼를 썼다.


서울로 돌아오던 날, 싸리 눈이 날리던 풍경은 삭막하고 음울했다. 그리고 잊은 줄로만 알았던 기억들이 환영처럼 도시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추운 겨울 내내 향수병에 걸린 사람처럼 바기오를 너무도 그리워했다. 하지만 사람은 시간 속에서 치유되고 성장한다. 지나온 세월들 속에서 다행히도 많은 기억들이 흩어졌고, 바기오에 갈 수 없는 이유들이 늘어갔고, 여행지의 인연들과도 점점 멀어져 갔다.      


몇 해 전부터 뺨에 서늘한 바람이 스치기 시작하는 늦여름이 되면 서서히 불안감에 휩싸였다. 단순한 계절성 우울증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생존의 겨울나기를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복되는 사이클에서 벗어나려고 목록을 작성하고 시뮬레이션을 해가며 만반의 준비를 해본다. 일조량을 늘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도 만들고, 이번엔 예년과 다르리라는 자기 최면도 걸어본다. 몇 개월 간 다짐과 준비가 무색하게도 겨울이 끝날 즈음 나는 다시 백기를 들어야 했다. 호기롭게 계획한 공부가 보기 좋게 엎어지자 재빨리 취직을 결심했다. 아침 9시 출근 저녁 6시 퇴근의 일상이 나를 우울의 늪에서 구해주리라 믿었다.


“합격하셨습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세요.”라는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비수기 3월, 마닐라행 비행기가 20만 원 대였고, 역마를 풀어주지 않으면 정신이 도저히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바기오가 간절히 그리웠다. 세션 로드의 판데살 빵 십여 개와 카페 루인(Cafe By Ruin)의 요리 한 접시, 원산지 커피 몇 잔, 힐 스테이션 레스토랑(Hill Station)의 황금비율로 말은 블랙러시안 한 잔, 아니 석 잔, 마운틴 클라우드 책방(Mt. Cloud Bookshop)의 총천연색 책과 아트 굿즈, 맑은 공기에 뒤섞인 지프니 매연 냄새를 맡으면, 주인 잃고 떠돌던 정신이 되돌아올 것 같았다. 그리고 재활용 비닐로 짠 낡은 동전지갑도 바꿔야 했고, 전통 손뜨개 팔찌도 사야 했고, 부적 삼아 방에 둘 바기오 산 조각품도 필요했다. 여행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가야만 하는 이유도 무한대로 늘어났다.


필리핀 마닐라행 비행기 티켓을 사고, 탈라 게스트 하우스에 일주일 치 숙박료를 지불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 직전까지 회사에 제출할 온갖 서류를 발급받고, 새 운동화로 갈아 신고, 한 손에 캐리어를 들고 공항버스로 뛰어올랐다. 창가 옆자리에 깊이 눌러앉아 머리를 기대자마자 안도감으로 노곤해졌다. 늦은 오후의 봄볕이 깊이 들어와 버스의 빈 좌석을 채우고 있었고, 창밖에 펼쳐지는 일상의 쳇바퀴에서 나만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듯한 기분에 더없이 홀가분했다. 나는 마치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이곳에 미련이 없었다.      


출국 전 공항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말할지 궁리하다가 “엄마, 나 필리핀 좀 다녀올게.”라고 실토하고 말았다. 유일한 동거인에게 최소한의 사실은 고지해야 했다.

“이게 미쳤네! 그래서 언제 오는데?”

“응, 일주일쯤 뒤에 올 거야, 곧바로 출근해야 되거든. 걱정하지 마, 연락할게!”     

나는 무정한 딸자식의 본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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