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쎄 Sep 20. 2019

#3. 가난한 호사가의 미술사 여행

여행의 고단함에 백기를 들다

바기오행 퍼스트 클래스 버스 -그냥 우등버스라고 하자- 에 올라 4시간을 달렸을까.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버스는 해발 1,500m의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벌써? 그렇다면 이 버스는 오갈 데도 없는 새벽녘에 나를 떨구고 가 버릴 예정이란 말인가? 레귤러 버스라면 여기저기 들러가며 족히 7시간이 걸리는 길이었는데... 나는 초초한 마음을 안고 바기오로 가는 길이 내 예상보다 멀기를 바라며 아직 깜깜한 차창 밖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산이 하늘과 닿는 바기오 시티의 검은 밤

우등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덜컹거리면서도 빠른 속도로 사정없이 질주하며 바기오 시내로 진입했다. 새벽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했었나. 결국 버스는 어둠을 뚫고 바기오 빅토리 라이너 터미널에 진입했다. 냉기가 도는 새벽녘, 두려운 마음이 앞섰지만 나는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깊은 새벽의 바기오는 너무 낯설었다.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이 앞서 짐을 끌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누가 봐도 갈 곳 없는 내게 터미널 주변의 모든 택시들이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빵빵대고, 몇몇은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호객을 하는 통에 정신이 혼미했다. 택시를 탄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게스트 하우스 체크인은 오후 한 시부터였다.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되는대로 빠르게 걸으며 거칠게 캐리어를 끌었다. 끈질기게 따라오는 택시들을 떨궈내야 했다. 터미널 앞 모퉁이를 돌자 근처에 여관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 선명한 빨간색으로 적힌 “숏 스테이인(short stay inn)”이 어둠 속에서 불을 켜고 있었다.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계단을 올라 입구 카운터에 있는 차임벨을 눌렀다. 카운터 안쪽에서 반사적으로 반동하며 일어난 남자(아니 소년일까?)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돼 있었고 머리는 멋대로 뻗쳐 있었다. 잠을 못 잔 데다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고 맨바닥에라도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단 가격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야 했다. 그런데 상대방의 대답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뭐라고 하는 걸까? 영어는 맞는 것 같은데 심한 필리핀 억양이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고, 눈치는 물론이고 상황 파악도 느린 내가 한스러웠다. 그래서 종이에다가 써줄 수 있냐고 사정했다. 새벽의 과객 때문에 잠을 설친 직원은 나보다 더 답답한 표정이었다. 그의 충혈된 눈은 나를 더욱 미안하게 했다.

한 참을 그랬을까. 말을 섞다 보니 직원이 하는 말이 점차 들리기 시작했다. 오전 10시에 체크아웃이라 지금부터  총 5시간 이용할 수 있으니 5백 페소를 지불하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연신 한 시간당 백 페소라고 말했던 것이다. 너무 창피해서 어디라도 숨고 싶었다.

베드 하나에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방 키를 받았다. 그런데 통로 맨 끝에 있는 방을 보자마자 눕고 싶던 마음이 금세 사라지는 게 아닌가. 허름하다기보다 철창 없는 감옥처럼 삭막했다. 내가 어쩌다 바기오의 이런 풍경을 보게 된 것일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움츠러들게 하고 감시받는 기분이 들어 쉽게 방에 들어서지 못했다. 굽은 등을 침대에 뉘어 원래대로 펴 주고 싶었지만, 쉽게 누울 수 없는 이 불쾌하고 꺼림칙한 기분이란! 온종일 밀린 일들을 해치우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버둥거리고, 비행기에서는 주변 소음과 불편한 좌석 때문에 한숨도 못 잔 데다, 밤 버스를 타고 5시간을 달려 겨우 찾은 침대 한 칸이 여기라니...!


그래도 어쩌랴. 살다 보면 가장 좋은 수를 얻으려다가 호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나는 한기가 도는 욕실로 들어가 얇게 뿜어 나오는 한줄기의 온수에 기대어 하루 반 만에 샤워를 했다. 그리고 친근하게도 지척에 바퀴벌레가 있었다. 그래, 기대는 언제나 나를 배신하는 법. 당장 이곳을 떠나 따뜻하고 안전한 내 방에 몸을 누이고 싶었지만, 나의 현재는 지금 이곳인 것을... 아무리 축지법에 통달했다 해도 소용없었다.


산꼭대기로 힘들게 오르는 아침해


이전 02화 #2. 가난한 호사가의 미술사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