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바기오의 청명한 하늘과 산들산들 봄바람 그리고 따뜻한 햇볕이 주는 안락함! 입 마르게 칭송하던 바기오의 기후는 모든 이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바기오의 가장 큰 자산이었다. 물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감히 숙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허름한 시멘트 벽 사이에서 옷과 담요를 둘둘 말고 미라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동굴 속에 들어온 듯 공기는 냉랭하고 습했다. 입김이 나올 지경이었다.
바기오의 연중 기온은 23~25°C이고 나는 겨울을 피해 이곳에 왔다. 그런데 왜 나는 뼈 속으로 흘러드는 냉기와 맞서고 있는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바퀴벌레가 자유롭게 횡단했을 것 같은 얇은 담요를 아무렇지 않게 덮고 해가 뜨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십분 간격으로 잠들었다가 깨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아 몇 시쯤 되었을까? 복도에서 깔깔깔 떠드는 소리가 벽을 타고 그대로 들어왔고 동굴 같은 시멘트 방에 아침볕이 들었다.
‘이런 곳에서도 저렇게 쾌활할 수 있다니...! 이제 나가도 되는 걸까?’ 나는 몽롱한 채로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맸다. 몸은 잠들기 전보다 더 피곤했다. 이대로 더 누워있을 수 없었다. 짤랑거리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 교도소 간수가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탈출해도 좋을 만큼 날이 밝았다. 나는 시커멓고 눅눅한 냉기를 잔뜩 머금은 채로 숙소를 나왔다.
맑고 청량한 대기와 부드러운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 9시 반. 나는 여행 하루 만에 몸과 마음이 누더기가 되었고 반쯤 넋이 나간 채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얼어 있던 내 몸은 아이스크림 콘처럼 눅눅하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민망할 정도로 화사한 봄볕이 초췌한 몰골을 환히 비췄고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어느 좀비처럼 터덕터덕 세션 로드를 따라 SM 몰로 향했다.
나는 평온한 아침 바기오의 중심가에 출현한 외국인 좀비였다. 이 몰골을 하고 걷고 있을 줄이야...! SM몰은 개장 전이었고, 나를 받아준 곳은 바로 옆 스타벅스였다. 나는 몸의 모든 부위를 최대한 활용해 짐을 이고 지고 끌어서 겨우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손님들은 전부 백인 노인들이었다. 그래, 커피를 직접 재배하는 국가에서 비싼 스타벅스를 이용할 이유가 없지. 아, 그리고 갈 곳 없는 한국인 한 명이 방금 입장했다. 초췌한 한국인은 주문대에서 두유를 소이소스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커피에 간장이라니 끔찍한 맛일 게다. 하지만 나는 너무 지쳐서 민망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다행히 친절한 점원 덕분에 나는 두유 라테를 받아 들고 햇볕이 드는 벤치에 앉아 온몸의 냉기가 빠져나갈 때까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겨울 내내 이리저리 바둥대며 은신처를 찾다가 한낮의 양달에서 볕을 쬐는 고양이처럼.
SM몰은 바기오의 중심가에 우뚝 솟아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최적의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파인스 호텔이라는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국제적 호텔이 있었다. 1983년 대형화재를 겪었고 2003년, 같은 자리에 대형마트가 들어섰다. 거대한 몰 안에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들릴 수밖에 없는 곳이다. 물론 오락실이나 놀이터, 영화관, 서점, 약국, 환전소도 있는 데다 경관도 좋아서 데이트하기에도 좋다.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나는 몰에 들어가 생필품을 주어 담고 얼마간 환전을 한 뒤 그토록 바라던 힐 스테이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힐 스테이션은 카사발리아호라는 이름의 건물에 자리 잡은 고급 레스토랑이다. 언덕 끝에 지어진 건물은 그 자체로도 멋지지만 바기오 시네마떼끄와 마운틴 클라우드 북샵까지 들어서 있어서 내게는 완벽한 공간이었다.
건물은 중앙계단식 구조로 입구에서 위로 올라가면 호텔과 마사지샵으로 이어지고 아래로 내려가면 힐 스테이션 레스토랑과 북샵 그리고 시네마떼끄로 이어진다. 반계단 아래로 들어서면 다소 어두운 전실이 나온다. 고동 빛의 반들거리는 바닥 위로 오렌지 빛의 은은한 조명이 공간을 감싼다. 이곳이 바로 완벽한 비율의 블랙러시안을 마실 수 있는 칵테일 바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훌륭한 비율의 흠잡을 데 없는 블랙러시안을 한 모금 들이키면 적당한 홍조를 띤 뺨으로 ‘브라보! 브라보’를 외치게 된다. 하지만 술을 마시기엔 부끄러운 오전 시간이니 들뜬 맘을 부여잡고 바를 지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깊숙이 들어가면 환하게 펼쳐진 홀이 나온다. 정면은 물론 좌우 측면이 모두 큼지막한 창문으로 열려있어 녹색의 푸르름과 푸른빛의 하늘이 홀 안에 가득 찬다. 높은 천장은 심플한 목재 건축의 구조물이 고스란히 드러나 고풍스럽고, 대들보 사이사이로 반짝이는 패브릭 장식과 바기오 특유의 색종이 컷팅이 가벼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웨이터 아저씨가 내 짐을 보자마자 들어주려고 하셨다. 아니 이분은 7년 전 바로 그분! 다시 뵌 것도 감격스러운데 미천한 제 짐까지 옮겨주신다니 내가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자 정말 괜찮겠냐고 빙그레 웃어주신다. 창가 옆에 자리를 잡고 짐을 내려놓자 이제야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실감이 났다. 바기오 여행은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