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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Oct 01. 2020

#5. 가난한 호사가의 미술사 여행

Tala 게스트하우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고 숙소가 있는 지브랄타로드(Gibraltar Rd.)로 향했다. 바기오의 중심가인 세션 로드에서는 택시로 10여분이 넘게 걸리는 외곽도로까지 달려야 했다. 티쳐스 캠프와 보태니칼 가든을 지나 말똥 냄새가 훅 끼쳐오는 팍달 서클까지 도착했다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나는 으리으리한 호텔 엘리자베스 앞에서 짐을 내렸다. 아직 아침의 서늘함이 미쳐 가시지 않은 나무숲의 내음을 맡으면서 군데군데 말똥이 말라붙어 있는 길을 따라 몇 미터를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탈라 게스트하우스 입구

끼이익 소리를 내며 허술하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화면으로만 보던 탈라Tala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한 것이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는 내가 필리핀을 떠나던 그 해에 문을 열었다. 푸른색 페인트로 도장을 한 이 건물은 맞배지붕 모양으로 이루어진 목재 건물로 오르막에 걸쳐 있어서 입구에서 보면 단층 건물이지만, 언덕 반대쪽으로 환하게 트인 3층짜리 건물이다.  

탈라 게스트하우스의 신발장 안내

입구의 계단을 따라 짐을 끌고 내려가니 현관 앞이었다. 사이즈 별로 색상이 다른 실내화가 신발장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사이즈의 갈색 슬리퍼로 갈아 신고 등산화를 신발장에 넣은 후, 마음을 가다듬고 현관 문고리를 돌려 문을 활짝 열었다.

삐그덕 거리는 마룻바닥 위로 짐을 옮겨 나르며 거실에 있던 두 명의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내게 다가온 이가 게스트하우스의 인턴 사토미였다. 그녀는 일본식 억양이 밴 영어로 익숙하게 손님을 맞이했다. 그리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이는 게스트하우스의 손님 미츠다 씨였다.

내가 예약한 도미토리 룸에는 마침 나 혼자 뿐이어서 가장 안락해 보이는 침대에 짐을 풀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2개의 이층 침대에 화장실이 딸린 방은 다소 어둡고 습습했고, 천장에는 검푸른 얼룩이 넓게 퍼져 있었다. 창 밖으로는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와 잡풀들로 햇볕이 들기 어려워 보였다. 그래도 무심한 듯 심플한 인테리어와 낮은 조명, 그리고 오래된 목재 건물이 주는 나름의 운치가 전체적으로 편안한 집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사토미가 그린 게스트하우스 주변 안내지도

나는 간단하게 짐을 챙겨서 룸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서는 여전히 사토미와 미츠다 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테이블 한편에 앉자 한국인 게스트는 처음 본다며 어떻게 탈라를 알게 되었는지 이것저것 물으며 내 말 끝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일본인 특유의 감탄사("~에?")를 연발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쳐졌던 기분이 금세 되살아났다. 아무래도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사토미는 직접 그린 탈라 게스트하우스 지도를 다소 부끄러운 표정으로 보여주면서 계속 고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사토미는 지도에 있는 맛있는 커피가게를 이곳저곳 알려주면서 꼭 가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미츠다 씨는 2년간 한국에 살았던 경험을 더디지만 정확한 한국어로 일러주었다. 그녀는 선교를 위해 영어를 배우고자 바기오에 머물고 있었다.

미츠다 씨가 오후 일정으로 자리를 비우자 사토미는 그제야 고개를 저으며 미츠다 씨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 다소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나타나 주어서 고맙다고 털어놓았다. 끈질긴 선교활동가와 곤란에 빠진 무신론자라니, 외국에서 만나기엔 너무 익숙한 모습이 아닌가. 게스트하우스의 호스트로서 하염없이 게스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던 사토미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타인의 종교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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