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쎄 Oct 01. 2020

#6. 가난한 호사가의 미술사 여행

해발 1,500m의 도시, 바기오와의 인연

밀리터리 컷오프 로드의 벽화 - 도착한 날 오후의 햇살과 안식을 주는 문구

필리핀의 그 많은 환상적인 해안가를 마다하고 굳이 7시간 거리의 산간지대를 버스로 올라 일본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코디리레라 네트워크에 기웃거려야 달래지는 바기오 향수병은 대략 7년 전 시작되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악을 써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그 때, 내 가족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파산상태에 처해 있었다. 생각해 보지도 못한 가정폭력 사태를 겪고, 부모님의 재판이혼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결혼도 하기 전에 이혼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감했다. 나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하드코어 한 일상을 버티지 못했고, 누구를 만나든 내 격렬한 경험들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찾아온 우울이 온몸을 휘감아 나를 아래로 더 깊숙한 아래로 데려가는데도 나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듯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논문 준비 겸 영어공부에 몰입하려고 애썼다.


보다 밀도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에 단기 필리핀 어학연수 광고가 눈에 꽂혔다. 단 3개월에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을 것 같은 광고 문구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어떻게든 돈을 빌려서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결심한 지 단 몇 주 안에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바기오에 장기간 머문 다는 것이 이제와 무모하게 여겨지지만 그때는 반드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바기오 하늘의 구름 떼

마침 세 달에 걸친 우기가 끝난 시점, 형형한 푸른 하늘빛과 춤추는 듯한 구름 떼가 펼쳐지고 적당히 땀이 돋을 정도로 풍성한 햇볕이 내리쬐는 바기오의 10월. 갑작스러운 결정치고는 더없이 훌륭한 판단이었다. 한국에서의 모든 기억을 훌훌 털어버리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달콤했다. 어학연수를 명분으로 요양 여행을 온 나는 자유로웠고 걱정이 없었다. 나는 영어공부에 집중했고 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기피했다. 한국인, 한국어, 한국소식과 한국음식, 한국과 관련된 어떤 것과도 결별하고 싶었다. 이 낯선 곳에서 고향이 없는 이방인이 되고 싶었다.

환하게 틔인 숙소 밖 풍경

마침 수많은 한국인들 속에서 두 명의 일본인 친구들과 한 반이 된 것도 큰 행운이었다. 다행히 친구들은 나보다 영어공부가 잘 되어 있었고, 바기오에 머문지 몇 달째 되어가는 중이었다. 이들을 따라다니며 바기오의 맛집과 명소를 알아가게 되었다. 다행히 일본인 친구들은 문화예술과 환경이슈에 관심이 많았고, 인종적 민족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고, 필리핀의 각 지역과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즐겼다. 나는 친구들을 통해서 바기오를 활동기반으로 둔 일본의 NGO단체, CGN의 활동을 접하게 되었다. CGN(The Cordillera Green Network)은 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에서 필리핀에 많은 상처를 남긴 것을 인정하고, 오늘날 필리핀 사람들에게 역사적 화해를 청하고 경제적으로 자립을 지원하며 문화적으로도 평등하게 교류하는 환경시민단체이다. 나는 일본인 친구들의 초대로 이 단체의 다양한 행사에 하나 둘 참여하면서 점점 더 바기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것이 무심코 시작된 바기오와의 인연이 뜻밖의 친구들을 만나 예기치 못한 긴 인연으로 이어지게 된 연유였다. 


한국으로부터의 탈출이 주는 홀가분한 기분과 안락한 숙식 서비스에 만족하며 어학원에서 정해준 스케줄에 따라 생활한지 한달이 될 무렵이었다. 규칙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웠던 일본인 친구들이 마운틴프로빈스의 사방간(Sabangan) 지역에서 열리는 아트페스티벌에 같이 가자며 나를 설득했다. 단지 '예술'과 '페스티벌'이라는 단어의 조합만으로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고, 정확히 어떤 행사인지도 모른채 학원 매니저에게 주말 외박을 하겠노라고 떼를 썼다. 사실 내게 필리핀은 저렴하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장소였을 뿐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단지 주말에만 허락되는 짧은 외출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기오 곳곳에서 나를 매료시키는 것들을 발견하곤 했었다. 

Mt.Cloud책방의 한 켠(2012년)

지척에 있던 바기오 시네마떼끄에서는 무료로 유럽 각지의 아트하우스 영화와 필리핀의 예술영화를 번갈아가며 상영했고, 마운틴 클라우드 책방에서는 지역예술가가 만든 굿즈와 문구류 그리고 아트북을 전시했으며, 나르다 수공예 샵에서는 직물로 짠 팔찌와 바기오의 풍경이 담긴 태피스트리를 살 수 있었다. 나는 매주 바기오의 새로운 장소들을 순례하며 소소한 쇼핑과 문화생활 만으로도 벅찼다.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행운이 매일매일 이어지는 바기오에서 나는 처음으로 생이 주는 축복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이끄는대로 아트페스티벌에 가야만했고, 더이상 학원의 룰은 중요하지 않았다. 학원 매니저의 허락과 상관없이 나는 짐을 쌌고, 토요일 아침 마나미와 함께 시내 끝자락에 있는 바기오 시외터미널로 향했다. 거기에는 행사에 함께 할 일행들이 사방간 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들 사이에 낀 유일한 이방인이었고, 알지 못하는 세계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전 05화 #5. 가난한 호사가의 미술사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