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을 찾으려면 후회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여행길은 고행길의 다른 말이다. 바기오에 가려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인천에서 마닐라까지 4시간여의 비행에 이어 6시간여를 버스로 달려야 해발 1,500미터 높이에 자리 잡은 바기오에 도착한다. 밤 비행기라면 마닐라에서 파사이 터미널까지 택시로 이동할 때 다소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낮 비행기라면 터미널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겠지만 바기오에는 자정에나 도착할 것이다.
외지인으로 택시에 몸과 짐을 맡기는 일은 언제나 피하고 싶은 일이다. 마닐라 시내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나는 중국해 상공을 위에 있었다. 마닐라 공항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든지, 가장 믿을만해 보이는 택시를 타는 방법뿐이었다. 고민을 하는 와중에 허리가 너무 아팠다. 저렴하게 구입한 항공편은 쿠션감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거의 기울어지지 않는 전형적인 환승용 소형 여객기였다. 어떻게든 가장 편한 자세를 찾으려고 몸을 배배 꽈보아도 별도리가 없었다. 주변을 힐끔 둘러보고는 비어있던 옆 좌석에 몸을 뉘었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네.’ 하던 찰나, 비행기가 마닐라 상공에 도착했다는 기장의 목소리가 원망스럽게 들렸다.
한 숨도 제대로 못 자고 일어나 우르르 사람들이 몰리는 방향으로 그저 따라가니 입국 수속 장에 이르렀고, 승객들을 따라 짐을 찾았다. 잠결에 이리저리 쓸려 다니다 보니 이미 마닐라 공항 밖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당황했다. 공항에서 밤을 새우려던 선택지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입국장엔 머물 장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짐을 끌고 혼자 버스 터미널까지 가야 했다. 입국장 초입에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팻말을 든 사람들로 빼곡했다. 누군가 나를 반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슬며시 삐져나왔다. 너무나 피곤했고, 당장이라도 몸을 뉘어 쉬고 싶었기에,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만 준다면 그저 반가울 참이었다. 하지만 뒤돌아볼 것도 없이 그 많은 인파는 내가 완전히 혼자라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었고, 스스로 고행을 자처한 사람은 후회를 해봐야 자신에게 돌아오는 화살을 맞을 뿐이다.
나는 걷던 방향을 되돌릴 수 없었다. 아무런 확신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택시 터미널을 향해 걸었다. 승강장 끝에 한 직원이 택시 승객에게 영수증을 발급해주고 있었다. 순간, 안도의 한 숨이 나왔다. 다행히 승차 시스템이 바뀌었는지 직원에게 목적지를 대고 선불로 택시비를 내면 승차할 택시를 지정받는 방식이었다. 전날부터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택시 기사와 요금이나 목적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일 필요가 없었다. 걱정을 덜자 긴장이 풀렸다. 택시 기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무겁고 눅눅한 대기에서 이제야 서늘한 밤바람이 부는 듯했고, 필리핀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닿았고, 드문드문 켜 진 가로등의 불 빛 아래로 길가에 늘어선 큼직한 활엽수가 보였다. 거리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창밖에 펼쳐진 반가운 풍경에 마음이 설렜다. 마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친숙한 올드팝! 노래를 흥얼거릴 여유가 생기자 저절로 웃음이 났다. 나는 필리핀에 와 있었다.
파사이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빨리 출발하는 바기오행 버스 티켓을 구입했다. 화장실까지 갖춘 일등석 직행버스로 새벽 1시 반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승차 전까지 잠깐 숨을 돌리려다 승강장 왼편에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를 발견했다. 라운지에 들어서자마자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기대한 사람은 나뿐이었을까?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기울어진 철제 벤치에 앉아서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이처럼 소박한 공간을 굳이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라고 이름 붙인 까닭을 찾고 있었다. 아마도 에어컨이 그 답이었을까. 단출한 커피 테이블과 창가에 비친 수녀님이 담긴 일등석 라운지가 이번 여행의 첫 사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