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불가능한 시대, 느적거리는 여행을 그리며
여행을 가기 전 인터넷에서 최적의 여행코스를 치면, “이 도시는 3일짜리 도시다"라는 글이 나온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부부에게는 일주일은 필요하다. 나는 남들보다 두 배의 시간은 필요하니까.
이를 처음 깨달은 것은 스페인을 갔을 때였다.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에서 렌트카를 빌릴때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을, 다음 도시인 네르하에서 또 만났다. 가볍게 인사하고 행선지를 물어보니 바로 론다로 가서 숙박을 한단다. 우리는 론다에 다음 날 갈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 여행자들은 우리보다 두배는 빠르게 움직이는 셈이다.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내고 왔을 휴가인지 눈에 선하다. 그 전후로, 연차를 쓰기 위해 온갖 일들은 다 처리하고 왔을 것이며 상사 눈치는 얼마나 봤겠는가. 그러니 최대한 많은 곳을 누비며 눈도장을 찍고 싶겠지.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럴 수 없었다. 딱 남들 두 배가 필요했다. 예컨데 보통 니스에서는 맛보기로 3일이 필요하다 한다. 그 사이에 니스뿐 아니라 근교 도시도 야무지게 찍어줘야 한다. 피카소의 별장이 있었다는 예쁜 언덕 마을, 레몬 축제가 유명했던 망통, 카지노가 있다는 도시 공국 모나코 등등. 하지만 우리는 니스 시내에서만 5일 넘게 있었다.(아, 좋은 풍경은 다 근교에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지 보자.
일단, 첫날은 낯선 동네에 적응한다. 남들에 비해 돌아다니는 시간이 적은 편이라 숙소에 있을 시간이 긴 편이다. 그래서 빨리 숙소에 적응하도록 노력한다. 그다음엔 마트나 시장을 찾는다. 겨우 익힌 외국어 - 소고기, 사과, 우유 등-로 먹을 것을 고른다. 마트는 하루에 한 번씩 드나드는 게 예의다. 돌아오는 길에 아침으로 간단히 먹을 빵들을 사는 것도 잊지 않는다.
보통 하루에 갈 행선지는 두 곳을 넘기지 않는다. 그래도 미술관이 있다면 꼭 한 곳 이상은 들르려 한다. 대도시라 갈 만한 미술관이 많다면 세 곳은 들러야 한다. 그리고 미술관에서는 안경닦이를 하나 사온다.
이렇게 돌아다닐때 보통은 대중교통도 타지 않고 주구장창 걷는다. 낯선 나라에서 제대로 버스에서 내리는 일도, 행선지를 제대로 찾아가기엔 어렵지 않는가. 그래서 이왕이면 시가지가 작은 도시가 더 좋다.
그 도시에 공원이 많거나 바다가 있으면 더 좋다. 바닷가에 들어가지 않는다. 기껏해야 발을 담그는 정도.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고, 또 산책을 하고, 다음날 또 산책을 한다. 이렇게 되면 날씨가 며칠 흐려도 조금 덜 아쉬우니까. 날씨가 좋으면 벤치에 벌렁 드러눕는다.
마음에 드는 음식점이 있으면 여러번 가본다. 바르셀로나에서 마음에 들었던 타파(안주를 곁들인 술집)집은 세 번을 못 간게 아쉬웠고, 니스에서는 마음에 드는 마카롱집에 매일매일 발도장을 찍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다른 메뉴를 맛본다.
여행 마지막 날에는 가장 좋았던 장소를 한 번 더 간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아쉬워하며, 좋아하던 풍경 앞에서 울고 웃는다. 이 풍경을 눈에도 담고 영상으로도 남긴다.
느적느적 산책을 하고, 모르는 길이 있으면 멈춰섰다가, 하늘 사진을 찍고, 또다시 걷는 여행. 맛있는 빵집을 뚫어 아침을 먹고. 점심이나 저녁은 한 번, 그외에는 마트가 필수. 미술관에서 내가 아는 작품도 모르는 작품도 보면서 감탄하다가, 안경닦이 딱 하나 집어오는 여행. 그렇게 효율적이진 않다. 그래도 덜 아쉬운 여행이다.
이 글을 쓸 당시가 2018년 가을이었고, 나는 다음 해 멜버른을 갈 생각에 들떠있었다. 일주일 동안 멜버른에 있을텐데, 아무리 여행 후기를 찾아도 멜버른에 일주일동안 머문 사람들이 없다. 보통은 시드니와 같이 엮어 가는 곳이라 “3일짜리 도시"로 취급받는 곳이니까. 그 곳에서 일주일을 머물려니, 좀이 쑤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도 딱 저럴 것이고, 시간을 뭉개다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쓰고 2019년 초반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멜버른을 포기했고, 30*만원의 항공료 취소 위약금을 물고 그레이트오션로드(예쁜 바닷가가 있는)의 에어비엔비를 위약금 16만원을 물었다. 대신 2019년에 두 번 여행을 갔는데, 10초마다 한번씩 더위때문에 화를 냈고, 고생을 좀 해서 다시 동남아에 가지 않겠다 다짐했던 베트남 여행. 그리고 칼바람 맞고 앓아누웠던 제주도 여행이 있었다. 그리고 2020년, 호주에 산불이 났고, 코로나가 터졌다. 더이상 외국 여행이 불가능한 시대, 운신의 폭이 작아진 시대. 앞으로 어쩌면 5년 간 해외여행은 불가능한 시대에, 느릿느릿 갔던 여행을 회상해본다.
*처음에 잘못 기억해서 80만원어치였다 생각했다, 다시 확인해보니 30만원 환불받은걸 확인해 정정해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