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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얀 Sep 26. 2021

사 주년을 보내며

쫄보 부부가 보냈던 결혼기념일

9월 24일 금요일은 결혼기념일이었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추석 연휴 이후 이틀을 더 쉬었다. 올해는 그냥 보내기 싫어 눈이 한없이 높아졌으나, 아래와 같은 사고 패턴을 거친 뒤 조금만 뻑적지근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여행 가야지! 바다보고 싶어 바다. 부산 해운대 동백섬 옆에 좋은 호텔이 있네.→아 근데 움직이려면 집에서 여섯시간이 걸리네. 생각보다 멀리 움직이기 귀찮다→그럼 공유 서비스에서 차 빌려서 근교라도 갈까. 태안 운전해서 가면 한시간 반이네. 물도 맑고 → 차 운전해서 가기엔 왠지 멀고 귀찮네. 얼마전에 가족이 본 신점중에 남편 운전 조심해야 한댔는데. (게다가 나는 운전을 못 한다) → 호텔이라도 가? 한 번쯤은 비싼 호텔에서 푹 쉴까? 한강 옆에 이 호텔 가격이 참 좋네. 숲속에 있다니 좋겠다. 호텔 조식도 먹어보고 싶다. 아니면 마곡으로 갈까? 거기 고등어 솥밥집도 있고 생면 라구파스타 집도 있고 호주식 라떼 엄청 맛있는 집이 있는데. → 집 놔두고 뭐하냐. 그 돈이면 식탁을 사겠다. 그리고 마곡도 광진구도 너무 멀다. →그럼 저렴한 데라도? 도심에 24시간 패키지들도 있네 →집 놔두고 뭐하냐. 정리할게 산더미인데. → 그럼 부페나 오마카세라는 거라도 먹어볼까. 앗, 서판교 엄청 맛있는 스테이크집이 있네. 한우 솥밥도 팔고. 근데 한끼에 25만원? → 아니. 예약이 다 찼어. 가려고 해도 못 가겠네.


그래서 목요일과 금요일은 그냥 동네 주변에서 맛있는 걸 가격 신경 안 쓰고 먹는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날씨도 좋으니 공원은 한 군데씩 들러서 햇볕 받으면서 낮잠 자고.


목요일에는 옆 동네인 과천에 가서 태국음식을 먹으면서 호기롭게 새우튀김 한 접시를 더 시켰다. 에그타르트를 사들고 동물원 옆 저수지에 앉아있으니 까만 왜가리가 날아들었다. 금요일에는 동네 스시집에서 오마카세 런치라는 것을 처음 먹어보았다. 한 끼 치고는 너무 비싸고 시간도 길다고 툴툴거리던 남편은 눈을 파르르 떨면서 맛있게 먹었다. 숙성회가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으니 입에서 살살 녹는 걸 음미한다나. 그리고 옆 도시 군포에 있는 공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타르트 종류별로 네 개 사왔다. 며칠 전 사둔 스파클링 와인과 타르트를 조금씩 먹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우리는 쫄보 둘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치를 하면서 결혼기념일을 보냈다.


목요일에 간 곳은 아무도 없던 과천저수지.


내가 스물 여덟, 남편은 서른 넷에 결혼해 결혼 사 주년을 맞았다. 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회사 생활을 그만두었고, 나는 사 년째 외벌이 중이다. 우리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결혼한 편이고 결혼 직전에 이런저런 다사다난한 일이 많았지만 어쨌든 무탈하게 지나고 있는 편이다. 남편 의견도 체크해봤는데, 그렇단다.. 내가 세뇌시킨걸까.


보통 나이 많은 쪽이 결혼하자고 하는데 우리는 반대였다. 내가 왜 그리도 결혼을 하고싶었나 생각해보면 무조건적인 내 사람이 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친해지길 바라는 단 한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심하게 의존하고 집착하는데, 남편은 충분히 그래도 되고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또 사실 그 즈음에 나는 독립을 하고 싶었나보다. 스물여덟정도 되니 머리가 굵어지면서 집안 어른들과 부딪히기 시작했고, 그래서 독립하는 겸 결혼을 했다. 아직도 신혼 첫 해 새벽에 둘이 손잡고 코인노래방 갔다왔을때의 즐거움이 잊히지 않는다. 본가에서는 집에 한 번 들어오면 슬쩍 혼자 외출하는 걸 상상도 못했는데, 자유가 느껴져서 좋았다.


개인적으로 결혼하면 좋은가? 라는 질문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결혼생활은 그런데로 좋은데, 결혼이야말로 개인적인 편차가 심하므로 일반화하긴 어렵다”는 논지의 말을 이리저리 웅얼거린다. 일단 나라는 사람이 혼자보다 둘이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 둘은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사실 서로 그닥 관심사가 맞진 않은데, 어느정도 가치관이 일치하고 우리만이 아는 세계관을 쌓고 있다는 게 좋다고 말한다. 경제적 가치관도 어느정도 맞춘 상황이고.


누군가 나에게 또다른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결혼을 결심하고, 유지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인가? 아이가 없는 상황이라면 그 경우 부부의 인연을 이어주게 하는 구심점은 무엇인가? 나는 서로만이 아는 이야기나 신뢰가 쌓여야 그 믿음이 생겨나는게 아닌가라고 주절거렸다.


우리가 서로에게 끈끈한 존재구나 느꼈던 사례가 두 개 있다. 결혼 후 깨달은 게 있는데 술주정과 잠버릇은 남편 한정으로만 나온다는 점이다. 부모님에게조차 보일 수 없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게 남편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결혼 직전에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이 주 동안 입원해있었는데, 주말마다 내가 돌보러 가면서 이제 내가 이 사람의 가족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사실 생각보다 한 사람을 더 책임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 년전 난 얼마나 미쳐있었길래 내가 "너를 먹여 살리겠다" 라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을까? 사실 스물여덟에 결혼한 내가 어렸기에 가능한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작년 가을부터 올해까지 제일 힘들었고, 다시 취업을 하면서 어느정도 경제적 불안은 가셨지만, 가차없이 남편에게 먹을거리를 찾아보라고 갈구는 중이다.


결혼은 참 무거운 제도다. 이제껏 삼십 년 전후로 따로 살았는데 이 사람과 앞으로 가족이란다. 노후 대비용 경제적 공동체를 만들고 충실한 연인이어야 한단다. 아이 생각이 있으면, 내 아이의 부모이기도 해야 한다. 거기에다 내가 생판 모르던 중년의 남녀 부부가 새로운 가족이란 부록으로 딸려온다. 부부는 0촌으로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면 디폴트로 나온다. 이혼은 감정적으로도 힘든 일이 많고 서류상 가장 복잡한 절차라지만, 이혼을 하면 또 남이 되는 인척이 부부다.


글을 쓰면서 남편한테 물어봤다. 생활동반자법처럼 정착된 제도가 있었다면 우린 결혼 대신 동거를 했을까? 남편은 일단 그랬으면 더 일찍 같이 살았을 것 같다고, 그럼에도 추후에는 혼인신고를 올렸을 거라 한다. 내 잠버릇을 몰라서 침대 사이즈를 잘못 골랐으니, 같이 살아본게 더 좋았을거란 말도 붙인다. 스물여덟쯤에야 겨우 앞가림을 하게 된 나로서는, 결혼을 더 일찍하지 못해 아쉽지만 더 일찍하지 않아 서로에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 이상한 일을 함께 사 년동안 헤쳐나가고 있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PS. 남편이 나오는 글은 항상 나름의 검수를 거친다. 한쪽 입장만 들어가면 억울할 테니까. 그런데로 무사 통과했는데, 깐깐하지 않게 글을 봐 준 남편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PS2. TMI로 위에 고려했던 곳들을 적어본다. 어딜가도 다 좋게 보냈을텐데, 이번엔 기회가 아닌 것으로.

부산 해운대 동백섬 옆에 좋은 호텔: 웨스틴조선호텔

광진구 숲속 호텔: 더글라스 하우스

마곡 호텔: 코트야드 메리어트 보타닉 가든(일명 마코야)

마곡 고등어 솥밥집: 울림

마곡 생면라구파스타 집: 임피아또

마곡 호주식 라떼: 해리스헤이스

도심 24시간 패키지: 신라스테이(정확히 24시간은 아니었다만 밥준다고.)

서판교 엄청 맛있는 스테이크집: 데이빗앤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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